<유승삼칼럼>'長考'할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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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으레 꺼내는 화두(話頭)는.이러다가는 나라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호사가(壕事家)들의 괜한걱정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개중에는 구체적 수치까지 들어가며 장래를 암담하게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아닌게 아니라 전문적 식견이나 지식이 없더라도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만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한때는 비록 중저가 시장이나 백화점에서였으나마 해외여행에서.Made in Korea'를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 았다.그래서외국언론에.한국인이 몰려온다'느니.한국주식회사'라느니 하는 특집기사까지 나온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그러나 요즘엔.Made in Korea'는 고급백화점에서는 물론 덤핑시장에서도 찾기 어렵다.기업인들은 하나같이“요즘 엔 내다 팔려야 팔 물건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 현 정권은 지극히 안이하고 독선적 판단아래 노동법.안기부법의 새벽 날치기를 감행해 스스로 정치위기를 빚어내더니 급기야는 쉬쉬 해오던.한보(韓寶)고름집'마저 터져 운신조차 못할 지경에 빠져버렸다.무정부 상태의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이러니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은 둘째 문제고 나라 운명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판에 북한 황장엽(黃長燁)의 망명사건까지 겹쳤다..화불단행(禍 單 )'이란 말이 실감난다.실로 엎친데 덮친 격이다.
우리 사회가 반석같이 안정돼 있다면야 황장엽의 망명은 좋은 이야기거리나 흥미의 대상일 수 있다.그러나 시기적으 로 보아 황장엽의 망명은 희소식이기보다는 우리앞에 가로놓인 또 하나의 버거운 짐이며 도전이다.
황장엽의 망명소식은 우리 사회가 경제외적으로도 얼마나 냉엄한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단정하는 것은지극히 위험한 일이겠으나 북한사회의 붕괴가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인식만은 가져야 하고 그에 대한 대 비가 있어야 마땅하다.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과연 지금 우리에게 그 상황을 감당할 정치적.경제적 능력이 있는가.제 몸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황장엽의 망명으로 인한 당장의 남북한간 정치적.군사적 긴장,남북한 및 중국간 외교적 분쟁에 적절히 대처할 능력이나 정신적 여유라도 있는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마치 우리 민족전체가 망해가는 것처럼 보일것이다.한반도의 북쪽은 황장엽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주의라는 이름하의.봉건주의'의 모순 때문에 망해가고 있고,남쪽은 남쪽대로 부패와 무능때문에 망해들어가고 있으니 이러다간. 한반도 공멸론'이라도 나오는게 아닌지 모르겠다.남쪽만이 아니라 북쪽도 한 핏줄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남북한 상황은 우리 민족 전체의 수치다. 현재의 시국에 비추어 볼 때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걱정해야 할 것은 레임덕도 아니고,다음 정권을 누가 담당하느냐도 아니다.또 이미 상황이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게 변해버렸다. 국민은 이젠 金대통령에게 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산산조각이 난 도덕성이 하루아침에 되살아나고,없는 능력이 어느날 갑자기 솟구쳐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따라서 무너진 경제를 하루 빨리 복원해내라고 채근하고 있지도 않다.다만 남은 기간이나마 金대통령이 정권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현재의 위기를 관리해 제발 문제를 더 키우지는 말고 다음 주자에게 바통이나 온전히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그런 최소한의 기대에 비춰봐도 金대통령의 이번 사태에대한 대응은 너무도 굼뜨다.우리 사회전체가 한보사건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진지가 이미 얼마인가.그런데도 이제까지 국민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변변한 말 한마디 직접 듣지 못하고 있다.우선 철저한 수사로 관련자를 처벌한뒤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당정개편과 제도개혁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는 스케줄이 흘러나온 바 있다.그렇다면 검찰수사가 끝날 때까지 현재 상태대로 마냥 침묵의 세월을 보내겠다는 것인데 과 연 그러한 여유가 우리 사회에 있는가.정말로 金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가 끝나기 전에는 사건 전모를 모른다는 것인가.
국민의 답답증과 불만은 고조돼가고 있다.이러다가는 얼마 뒤 담화를 발표한다 해도 그 약효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金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전면에 나서 국민과 직접 대화하고 사태수습을 진두지휘해야 한다.머뭇거리거나 장고(長考)할 시간이 없다유승삼 출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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