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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그의 숙명을 알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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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금강산 관광에 이어 12월 1일부터 개성 관광까지 중단되자 현대아산을 비롯한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됐다.

현정은 현대 회장의 고민 # 家業 같은 대북사업 위기 … ‘북한 길’ 꽉 막혀도 포기 못해

지난 7월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상황에서 그나마 대북사업의 명맥을 이어가던 개성 관광 길마저 막힌 것이다. 현정은 회장은 취임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대북사업의 존폐 기로에 서 있다.

피해도 크다. 이미 금강산 사태로 800억원 이상의 손실을 입은 데다 개성 관광마저 중단돼 앞으로 매달 20억원 이상의 추가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점쳐진다.

남편 잃은 뒤 이어받은 사업

현 회장은 물론 그룹 내 누구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올 줄은 몰랐던 눈치다. 북측의 중단 통보가 나오기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은 낙관론을 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12월 개성 관광이 시작된 데 이어 현 회장이 북측으로부터 백두산 직항로 관광과 비로봉 관광 등에 대한 승인을 받아 금강산 관광 중단에도 전체 대북사업은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상황이 암담하지만 현대아산 측은 공식적으로는 사업 재개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현대아산 측이 “북측 역시 금강산과 개성 관광 정상화 의지가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북측과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 회장이 대북사업을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취임 5주년…고난의 세월

2003년 8월 4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타계
2003년 10월 21일 현정은 회장 취임
2003년 8월~04년 3월 정상영 KCC 회장과 경영권 분쟁
2004년 5월 11일 현 회장, 첫 북한 방문
2005년 10월 북, 김윤규 사장 퇴출에 반발해 현대와의 사업 재검토 경고
2005년 4월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경영권 분쟁
2007년 12월 백두산 직항로 관광 승인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금강산 관광 중단
2008년 11월 24일 북, 개성 관광 중단 선언

“단 한 명이 북측 관광지를 찾는다 해도 대북사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터진 북핵 사태로 금강산 관광객이 하루 20명 수준으로 떨어졌을 때 현 회장이 한 말이다.‘단 한 명’이란 표현은 비장한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말 속엔 현 회장의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외로운’ 심정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2003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이어받은 현 회장에게 지난 5년은 외로운 여정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났다.

대북사업 경험이 풍부한 전문경영인 김윤규 부회장과 결별했고, 그 때문인지 북측의 신뢰가 시들해져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여기에 정상영 KCC 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등 정씨 일가와도 경영권 분쟁으로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북핵 문제는 대북사업을 가로막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잠시 물꼬가 트이는가 싶더니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피격 당하는 참변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선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금강산에 이어 개성으로 가는 길도 막혀 버렸다. 사람도, 정치적 환경도, 심지어 운도 따라주지 않는 이 외로운 대북사업에 현 회장은 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경영자로, 사업가로 살지 않았던 그를 어쩌면 이 시대 가장 불확실한 사업에서 손을 못 떼게 하는 것일까. 그것도 번번이 고배를 마시면서-. 대북사업은 현 회장에게 비즈니스 이상의 무엇임에 틀림없다. 대북사업은 시아버지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미완의 대업이자 유지였다.

그 뜻을 받들려다 남편 정몽헌 회장은 끝내 목숨까지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현 회장에게 대북사업은 나라를 위한 사업이란 대의(大義) 이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남편 정몽헌 회장과 현 회장 자신이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난관에도 대북사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현대그룹의 역사와 전통이 자신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수백억원대 손실을 보는 상황에서도 현 회장이 “현대아산 자체가 수익을 남기기 위해 만든 사업체가 아닌 만큼 내핍을 통해 대북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도 이런 신념과 맥을 같이한다.

그룹 경영은 5년 연속 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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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데는 현 회장에게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정신적 이유 못지않게 경영권 방어라는 현실적 이유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대북사업을 지속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경영권을 위태롭게 하는 공격이 들어오는데, 대북사업을 접을 경우 가장 중요한 명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룹의 정통성과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그토록 중요한 대북사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 현 회장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정치·외교적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현 회장의 사업 추진력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다. 우선 북측과 신뢰관계를 강화하는 데 사업적 수완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윤규 부회장과의 불화로 북측으로부터 이전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투자도 그다지 공격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숙명적 사업이라는 강한 의지에 비해 그룹 차원은 물론, 현 회장 개인으로도 이렇다 할 투자가 이뤄지지 못했음을 꼬집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사태를 불러온 관광객 피격사건 때도 적극적인 위기관리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현 회장이 앞장서 문제해결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의견이다. 근본적으로 현 회장이 대북사업과 관련해 북측과 협상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북측에서 책임 있는 오너가 전면에 나서주기를 원할 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북사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현 회장의 경영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룹 경영에서 보여준 현 회장의 리더십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가부장적 현대가에서 남편을 잃고 그룹을 맡아 경영한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취임 전까지 사업 경험이 없는 여성 오너가 영욕의 그룹을 이끌고 거친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현 회장이 그룹 총수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도 큰 성과다. 현 회장이 취임 이후 그룹 경영에서 올린 성과도 괜찮다. 침몰 직전의 ‘현대호’를 넘겨받은 지 5년. 처음엔 현대가 안팎에서 평범한 주부였던 현 회장의 경영능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 많았다.

현 회장은 실적으로 이런 의구심을 잠재웠다. 대북송금 사건으로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갑작스러운 정몽헌 회장 타계 직후 KCC와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결국 현 회장 취임 첫해인 2003년 2654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 회장은 상처를 감수하며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하고 계열사 추스르기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듬해 현대그룹은 5741억원의 순이익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취임 2년째엔 전 계열사가 영업이익 흑자를 달성하며 지속적으로 흑자를 낼 수 있는 수익구조를 갖추었다. 지난해에는 2003년에 비해 75% 증가한 9조526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영업이익 역시 55% 증가한 6772억원을 달성했다. 재무구조도 눈에 띄게 건실해졌다.

2003년 527% 달했던 부채비율은 지난해 158%까지 뚝 떨어졌다. 현대그룹은 2008년에도 흑자경영 기조를 이어가며 5년 연속 흑자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대외 신인도도 급상승했다. 현대상선, 현대증권 등 주요 계열사의 재무상태가 좋아지면서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의 회사채 신용등급이 2003년 대비 최고 6단계 상승했다.

고민이라면 현대건설 인수 문제다. 지난 3월 정주영 명예회장 7주기 때 선영에 참배하며 현 회장은 “현대건설을 반드시 인수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현 회장은 2012년 그룹 매출 34조원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기 위해 현대건설 인수가 꼭 필요하다는 게 현 회장의 생각이다. 현대건설 인수는 향후 북한의 SOC 사업뿐 아니라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등 전 계열사의 사업과 연계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건설과 제조가 주축이 된 인프라 사업부문, 해운과 택배를 중심축으로 한 통합물류 사업부문, 증권이 중심이 된 금융서비스 사업부문 등 3대 축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 나가겠다는 전략이다. 현 회장은 글로벌 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올해 초 전 계열사의 글로벌 역량 강화를 당부했다.

계열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대상선은 올해 러시아·두바이·시드니 등지에 현지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2010년까지 해외거점을 10개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택배와 현대엘리베이터 역시 중국 등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때론 주판 덮고 일할 때도 있다

현 회장은 북핵 사태로 남북경협사업이 좌초될 뻔한 위기도, 두 차례에 걸친 경영권 분쟁도 극복해 냈다. 지난 7월 금강산 관광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지난 8월에는 조건식 전 통일부 차관을 현대아산 신임사장으로 선임하고, 올해 연간 실적 목표치를 늘려 잡으며 정면 돌파에 나섰다.

그룹 매출 목표를 12조3000억원으로 애초 11조2000억원보다 10%가량 상향 조정하고 영업이익도 8300억원에서 6% 많은 8800억원으로 높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생애 동안 역사에 남을 정치가, 학자, 혁명가가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기업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주부도 역사에 남을 기업가가 될 수 있다.

현 회장은 지난 8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73위에 올랐으며, 지난해 11월에는 ‘월스트리트저널’이 뽑은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36위에 오르는 등 글로벌 경영자로서 능력과 영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개성 관광은 물론 금강산 관광도 언제 재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북측은 최근 “관광을 비롯한 현대아산과의 협력사업 정상화는 남측에 달려 있다”며 “우리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2005년 8월 내부 문제로 북측과 갈등이 불거졌을 때도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선택하겠다”는 승부수로 신뢰를 회복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어록 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기업인은 주판을 덮고 일할 때도 있다. 도중에 적자가 나더라도 공사를 중단해선 안 된다. 신용을 잃으면 끝장이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의 정신적 지주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지금 현 회장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이는 따로 있을 듯싶다. 올봄 정몽헌 회장을 추모하는 ‘나래’라는 곡이 울려 퍼지자 현 회장은 이렇게 외쳤다. “그립습니다. 정몽헌 회장님!”

이임광 기업전문기자·llkhkb@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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