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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황세희의몸&마음] 성폭행 예방 시스템 만들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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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이야기다. 하루는 열 살 된 예쁜 소녀가 축농증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진료실을 찾았다. 아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이에 안 맞게 멍하고 우수에 찬 표정 때문이었다.

“우와~! 너무 예뻐서 선생님이 깜짝 놀랐네, 약 잘 먹으면 금방 좋아질 거야, 선생님이 약속해.”

나는 호들갑을 떨며 아이에게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래도 아이는 한 마디 대꾸 없이 웃음과 비웃음의 중간쯤 되는 미소만 간신히 지어 보였다.

일단 아이를 간호사와 함께 진료실 밖으로 내보낸 뒤 나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축농증은 걱정 마세요.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어둡고 걱정이 많아 보여요. 무슨 일이 있은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고민거리를 해결해 줘야 될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어머니는 1년 전, 삼촌이 딸 아이를 성폭행했고, 아이는 그때부터 말을 안 하게 됐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통상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가족 내 성(性)폭행은 가해자가 절대적인 압력을 행사하면서 피해자의 입을 봉쇄한다. 반면 가해자는 성폭행이란 범죄를 저지른 뒤에도 피해자로부터 죄를 추궁받고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

특히 근친 강간은 사회적으로 절대 금기 사항이라 온 가족이 쉬쉬하며 은폐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족 내 성폭행이 은밀하게 장기간·반복적으로 자행되는 이유다. 물론 피해자의 후유증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설마’하는 우려와 달리 가족 내 성폭행은 드물지만은 않다. 실제 국내 청소년 17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3.7%가 근친상간 경험을 고백했고,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응급실 등에 근무한 의사 중 53%가 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어른으로부터 성폭행당한 미성년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을 정도다.

빙산의 일각처럼 보고되는 사례들을 보면 국내 근친 강간의 가해자는 친아버지인 경우가 가장 많다. 하지만 친남매, 의붓 아버지, 모자간, 부자간 등 다양하다.

의학적으로 근친 강간은 피해자가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응급 상황’으로 분류된다. 만일 전문가가 조기에 개입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치료하고 재발을 막지 못하면 피해자는 우울증·불안증·수면장애는 물론 반복적인 자해나 자살 시도, 약물 남용 등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어진다.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철저히 격리시키는 일이다.

최근 16세 정신지체 소녀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87세 친할아버지, 57세 백부, 42세·39세 숙부, 사촌 오빠 등에 대해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분노로 들끓고 있다. 하지만 지금 가해자 처벌보다 시급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장기적인 치료 계획이다. 지능이 낮다고 정신적인 충격과 후유증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년·소녀를 대상으로 한 가족 내 성폭행은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사회라면 근친 강간 피해자를 발견하는 순간 전문가가 개입해 인면수심의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격리하고, 지속적인 치료와 지원을 해주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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