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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조선시대 때부터 장터는 ‘세상의 1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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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장의 역사
박은숙 지음, 역사비평사
436쪽, 1만9800원

“여점원 한 20명을 모집하겠습니다. 주로 여상(女商) 출신을 씁니다. 인물도 안 보는 바는 아닙니다. 손님에게 친절하며 품행이 방정한 여자를….”

1936년 백화점 여직원을 채용한다는 일간지 광고다. 일제시대 백화점 여직원은 쇼프걸(shopgirl)로 불렸는데, 당시 ‘나비같이 경쾌하게 서비스하는 제복의 처녀’라서 인기 만점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갑부 박흥식 소유의 화신백화점이 냈던 광고 아니던가. 『시장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 에스컬레이터 시설을 가졌던 화신은 명소였지만, 라이벌은 따로 있었다. 매출 규모와 화려함에서 화신을 압도했던 미쓰코시가 그곳이다.

미쓰코시는 지금 신세계 자리에 일본 재벌 미쓰이가 세웠던 ‘조선·만주 최대의 백화점’. 정찰제는 물론이고 매년 2, 9월 바겐세일도 했다는데, 이곳은 시인 이상의 ‘날개’ 작품 무대이기도 했다.

소설 뒷부분에서 주인공이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하고 외쳤던 장소가 미쓰코시의 옥상이다.


『시장의 역사』는 시장을 통해 본 한국사다. 유사 이래 시장의 흐름과 거래 풍속을 복원한 양질의 교양서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잘 훈련받은 역사학자라는 점을 금세 확인할 수 있는데, 민중들의 섬세한 숨결을 중시하는 일상사·미시사의 서술 태도가 은근히 배어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힌다.

미쓰코시가 혼마치(충무로)·명동 일대의 일본인 상권이라면, 화신은 주먹꾼 김두한의 영향 아래 있던 조선인 상권을 대표한다. 흥미로운 점은 화신의 전신인 화신상회다. 화신상회는 구한말 종로에서 금은세공업으로 성장했던 신태하의 대형잡화점. 자금난으로 1931년 박흥식에게 넘어갔다. 그러면 그 이전에 종로통은 어떠했을까? 종로는 ‘시장 1번지’였다. 조선시대 내내 궁궐의 허가 아래 독점적 거래와 함께 납품 기능을 맡은 시전(市廛)이 펼쳐졌던 블록이다.

하지만 화폐(동전)가 유통되며 조선의 시장 볼륨 전체가 커지던 17세기말 이후 종로 난전의 독점체제가 휘청거린다. 남대문·동대문 두 곳 성곽 밖에 자리 잡은 난전(亂廛·비공인 시장)의 급성장 때문인데, 그게 지금 남대문·동대문시장의 원형이다. 눈여겨 볼 점은 19세기에 벌써 시장은 ‘세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구한말 황성신문은 이렇게 개탄한다. “대저 돈이 신(神)이 되어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으며….” 이미 시장은 마몬(탐욕과 돈의 우상)의 용광로였다는 얘기다.

하긴 돈이 도는 시장은 고조선에도 있었다. 저자는 환웅이 3000명을 거느렸던 신시(神市)에 주목했다. 그곳은 제사 공간이지만, 장터 기능도 겸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분명 매력적인 이 신간은 감동까지는 다소 부족하다. 역사서에서 감동까지? 가능하다.

왁자지껄한 시장통의 사람 땀냄새까지 복원할 경우 말이다. 당대 사회경제사의 핵심까지 서술하면서 그걸 근거로 땀냄새도 살린다면…. 무리일까? 저자 역량이라면 요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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