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부호열전>2.南德회장 머우치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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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두차례에 걸친 투옥,숱한 파산으로 절망의 벼랑끝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기업인이 극적으로 재기,인공위성까지 띄운 꿈같은 스토리를 모르는 중국인은 없다. 머우치중(牟其中)남덕(南德)그룹회장.1940년 쓰촨(四川)성완시엔(萬縣)태생.공개된 개인재산만도 약 30억위안(한화 약3천억원).홍콩을 제외하고 대륙에서 가장 성공한 부호의 이력서다.그의 시련은 대학입시 때부터 시작된다.59년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입시를 치렀지만 입시전 한 사찰 벽에“신령께서 보호하사대학에 입학토록 해주소서”라고 쓴 글이 공안당국에 발각돼.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혀 낙방했다. 그를 벼랑끝으로 몰고간 일은 문화혁명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던 70년대초 마르크스연구회사건..문혁 주동자들은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해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이 연구회 강령이 그의 목을 죈 것.밀고로 체포된 牟는 74년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76년 문혁이 막을 내리자 그는 4년반의 철창생활에서풀려났으며 마침내 사업에 손을 댔다.80년 3백위안(3만원)의자본금으로 무역대행업을 시작,우편상품판매.위탁판매등 당시로선 기발한 아이디어로 히트를 했다.그러다 83년 다시 체포된다..자본금도 없이 폭리를 취하는 것은 투기및 탈세행위'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이 걸렸다. 투옥생활중 牟가 인민일보에 우송한.중국특색의 사회주의 학설과우리의 사명을 논함'이라는 논문이 또 한번의 반전을 마련할줄 자신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적확한 지적과 예리한 통찰력을 높이 산 인민일보는 이 논문을 전문 게재했고 이 를 본 중앙정부가 牟를 석방시켰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지지로 은행대출을 받아 84년 중국내 최초의 민간기업인 중덕(中德)실업개발총공사를 설립한다.하지만 이듬해 실시된 긴축정책으로 거래업체와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바람에1백60만위안의 빚만 진채 도산위기를 맞는다.그 는“천안문광장에서 분신자살할 각오로 유서까지 남긴 적이 있다”고 당시의 절박한 순간을 술회했다. 벼랑끝에 선 그를 구해낸 것은 뜻밖에도 미수교국이던 한국과의거래였다.홍콩의 한 무역상을 통해 한국에서 수입한 냉장설비가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 엄청난 돈을 번 것이다.불과 1년여만에 빚을 다 갚고도 남은 돈이 1천4백만위안(14억 원).대륙내 최대 민간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이후 牟의 사업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발전,80년대말 제2의 도약기회를 맞는다.당시 소련이 심각한 생필품난을 겪는 점에 착안,소련 민간여객기 TU-154기 4대를 중국산 생필품과 물물교환방식으로 도입한 것이다.당시 미국산 여객기의 4분의1 가격에 불과한 여객기 도입으로 수억위안(수백억원)의 이윤을 남겼다. 94년엔 러시아와 합작으로 .GALS'통신위성을 두차례 발사했고 같은해 미국기업의 중국투자를 보호하는 워싱턴 담보은행을설립했으며 최근들어 내몽고와 러시아를 잇는 철도건설을 추진하는등 여전히 왕성한 사업욕을 과시하고 있다. [베이징=문일현 특파원] 머우치중 회장이 남덕그룹과 공인일보(工人日報)가 공동주최한 .덩샤오핑의 경제발전사상 토론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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