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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서봉수 8연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도대체 기도(棋道)란 무엇입니까.”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던 젊은 프로기사 서봉수(徐奉洙)가 어떤 사사로운 자리에서 박학(博學)의 한 노인에게 물었다.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대답했다.“그야 물론.바둑(棋)의 길(道)'이지요.”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지만 서봉수는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프로기사들 사이에선 이따금“만약.바둑의 신(神)'이 있다면 인간은 몇점이나 접어야 될까”하는 것이 화제에 오른다.린하이펑(林海峰)은“석 점이라면 목숨을 걸고 두어볼 만 하다”고 말한적이 있지만 서봉수는“두 점 이상은 없다.아무리 신이라도 그것이 19줄 바둑의 한계”라고 말했다. 서봉수의 승부사 기질을 나타내는 일화들이다.72년 5월 만 20세가 채 안된 어린 나이에 명인(名人)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때도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진다는 감각을 잊은지 오래됐어요.예상대로 된 것같아요.” 몇 몇 선배들은너무 오만하지 않느냐는 반응이었지만 그것은 자기확신의 한 방편일 수도 있었다. 서봉수는 바둑의 승부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모든 승부에 집착한다.사람과의 승부는 물론 기계와의 승부에도 무아(無我)의 경지로 몰두한다.가령 한때 슬롯 머신에 빠졌던 까닭을 그는.승부의 세계에서는 지는 방법부터 터득해야 하는데 기 계가 그것을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기질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승부의 세계는 역시 냉혹하고 비정하다.조훈현(曺薰鉉).이창호(李昌鎬).유창혁(劉昌赫)등과 일본.중국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그 앞에 거대한 벽으로 버텨 서서 여러 차례의 좌절과 슬럼프를 겪게 했던 것이다.승률은 크게 떨어졌고 무관(無冠)의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번 진로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서봉수가 거둔 8연승의 대기록은 여러모로 뜻깊다.우선 국제대회 최다연승 신기록이라는 점,.순국산바둑'으로 일본.중국의 정상들을 모두 격파했다는 점,무엇보다 서봉수 개인으로서는 2년여에 걸친 부진을 털고 화려하게재기했다는 점이다.서봉수 바둑의 특징을 잡초같은 생명력과 강인한 근성으로 본다면 이번 대회에서 그에게 무릎을 꿇은 두 나라의 강자들은.한국 토종바둑'의 진면목을 톡톡히 맛봤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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