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독안의 농익은 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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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겨울이 익는다.마당 한 귀퉁이에 마련된 작은 화단에 그제 내린 잔설이 제 모양 그대로 앉아 있다.제법 강한 추위.덕'을 본 것이다.잔설은 무적처럼 침범해 화단 깊이 들어앉아 김치독 위에까지 소담스레 인정을 아끼지 않는다. 이맘때쯤,항아리 위를 포위한 눈을 가만가만 쓸어 내리며 뚜껑을 열어 본다.알맞게 삭힌 김치 냄새는 벌써 후각을 돋우고,굳이 시식하지 않아도 오랜 습연(襲沿),그 맛을 깊이 느끼고도 남는다.이렇게 김장이 제 맛을 우려낼 쯤 그것과 더불어 미각을잡아 끄는 부식거리가 무한정하다. .익기'초입에 들어간 시원한 김치를 밋밋한 국수가락에 얹어 먹는 제물국수의 맛!제물국수이기에 김치 토속의 맛이 한층 더 살아난다.그리고 김치는 시간에 따라 농익어 최상의 식단을 마련해 준다. 음력 설을 지나 시큼해진 김치와 으깬 두부만 버무려 만든 일명 김치만두는 중국식 고기만두에 비할 바가 안된다.뒷맛이 깔끔해 경계 없이 먹게 된다.그것 뿐일까.빠른 시간내 단출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김치볶음밥,조석 상위에 올려도 물리지 않는 김치찌개,그리고 손님상에 안주로 무난한 두부김치…. 봄이 오는 자락에 땅의 기운이 춘난(春暖)을 받아들이면 김치는 군내가 난다.이때 알뜰한 우리네 주부는 허옇게 옷을 입은 김칫속을 살랑 물에 흔들어 부침개 재료로 쓴다.또 군내끼를 물로 말끔히 우려내 꽉 쫘서 김치쌈을 해 먹으면 그 또한 쌈밥의메뉴로도 훌륭하다.이렇게 곰삭은 김치가 독 바닥에서 끝을 맺을때 겨울이 떠남은 진정 섭섭함이다. 그렇듯 김치가 주는 요리백과는 서민식단에 큰 의지이기도 하다.고마운 음식이다.그러나 표면화돼 있듯 우리의 김치가 일본인의상술과 약빠른 도득(圖得)으로 세계시장에서 자국상표를 빼앗겼다.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조상 세세의 세월만큼 비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것이 타국땅에서 주객전도된 이름으로 떠다니지 않기를 이 겨울 다시 한번 바란다. 주영선<서울관악구봉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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