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부도회오리>누가 지원 주도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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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보에 대한 초기 금융지원이 산업은행에 의해 주도됐다는 사실은 한보사태 배경을 밝히는 새로운 실마리다.준국가기관에 해당하는 산은이 시설자금을 대주고 여기에 시중은행이 모여드는 식의,60년대 이후의 전형적인 개발금융 모델이다.정부의 개입이나 외압 소지가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은행 관계자들의 증언과 은행감독원의 통계에 비춰보면 한보에 대한 금융지원은 초반 산은,후반에는 제일은행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한보철강에 대한 여신 추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격적인 지원은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진제철소가 착공된 89년부터 92년말까지 한보철강에 대한 6대 여신은행의 지원액은 3배(1천86억원→3천14억원)정도 늘어나는데 그쳤다.그러나 문민정부 출범뒤 4년간 이들의 지원액은 무려 10배(3천14억원→3조2백8억원)나 늘 어났다. 이같은 자금지원은 시기적으로 한보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이 수서사건의 부담을 털고 경영일선에 복귀하면서 본격화했다.산은 주도로 시설재를 수입하기 위한 외화자금 12억달러를 4개은행이 분담키로 하면서부터 은행들의 한보 지원이 본격화했 다. 이 자금 지원이 결정된뒤 5개월이 지나 한보측은 투자계획을 1조4천3백억원이나 늘려 잡았고,여기서부터 은행들은 계속 물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형구(李炯九)당시 산은총재는“주거래은행인 서울은행이한보철강의 사업계획이 타당하다고 인정한데다 상공부(통상산업부 전신)의 외화대출추천서도 나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산은의 다른 관계자도“당시 시중은행들은 한보철강 지원용 외화자금 조달에서 금리는 물론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각종 수수료수입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참여하겠다고 나섰다”고 말했다.그러나 시중은행들의 해석은 다르다.제일은행 관 계자는“94년 중반께 외화대출 얘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는데,산은이 나선다는점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참여했다”고 말했다.은행감독원 관계자도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다.이 관계자는“한보에 대한 지원은전형적인 개발금융 방식으로 이뤄졌다 ”고 말한다. 조흥은행 관계자도“만약 산은이 당시 외화조달 프로젝트를 주도하지 않았다면 다른 시중은행들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서울은행 관계자는“산은은 이미 92년 11월에도 한차례 한보에 대한 외화대출을 주도한바 있어 다른 시중은행 들이 산은을믿고 지원해도 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은 외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일은행의 이철수(李喆洙)당시 행장도 사석에서 산은이 주도하는 사업이라 걱정없다는 얘기를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李전행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95년 당시 제일은행의 지나친 한보 지원에 여러 사 람들이 우려를 표했는데,그때마다 李전행장은 낙관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산은과 제일은행은 94년이후 3년동안 각각 한보철강에 대한 여신지원을 2배(제일).4배(산은)가량 늘리고 있다.특히산은자금은 일반은행 대출금보다 금리가 0.5~1% 포인트 낮은데다 대부분 3년거치 5년분할 상환조건의 자금이 어서 크건 작건 기업들이 서로 쓰려는 자금이다. 그러나 산은 관계자는 한보에 대한 금융지원이 개발금융의 형식을 택하긴 했으나 다른 시중은행들이 강요에 의해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이은행의 한 임원은“한보지원이 광의의 개발금융이라는 점은 인정하나 나머지 시중은행의 참여는 손익을 따져본뒤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는“당시 鄭총회장은 4개 은행을 돌아다니며 다른 3개 은행은 다 해주기로 했으니 도와달라고 설득했다”고 전했다.그러나 이같은 鄭씨의 말을 그대로 믿고 대출해줄 은행이 어디 있 었겠느냐는게 금융가의 공통된 반응이다. 〈손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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