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그들>도우미 이미라씨가 본 문자호출 24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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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씨 없이는 못살아.×호텔 305호실로 빨리 와줘.”오후3시쯤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40대 여자의 음성.하루중 가장 짜증나는 시간이 오늘도 어김없이 돌아온다.느낌으로 대번에 불륜임을 알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미라(26.그래픽 얼굴)씨의마음은 무겁다.
평일 오후3시부터 5시까지는 이와 같은 중년 남녀들의 탐욕스런 목소리들이 끊이질 않는다.무슨 호텔로 당장 오라는 부탁,한번만 더 만나 달라는 애원,신체 부위를 들먹이는 음담패설등.“우리 사회의 불륜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몰랐다 ”는 그녀는“특히 이같은 내용을 전하는 사람중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다는 점은 큰 충격”이라며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지난해 9월부터 실시된 나래이동통신 문자호출 메신저 서비스의 도우미다.고객들의 전화를 받아 1분30초동안 이야기를들은 다음 이를 40자 이내의 문구로 줄여 컴퓨터를 통해 가입자의 문자호출기에 띄워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전하려는 이야기를 여과없이 그대로 타이핑한다.하지만 이같이 듣기 민망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사전검열'을 시작한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사전심의가 사라졌지만 폭력.음란 메시지들에 맞서는 이씨의 가위질은 이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다.거창하게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거론할 것은 없고 자체 설정한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 차원이다.
호출기에 뜬 문자를 보며 기분이 상할 고객을 생각하면 긴장을 떨치기 어렵다.
욕설은 절대 허용되지 않으므로 오히려 쉽다.음담패설의 경우가까다롭다.우선 남녀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는 쓸 수 없다.성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어휘도 전달이 안된다.하지만 간접적인표현을 할 경우가 곤혹스러워진다.최근 실례로“ 오빠와 지금 흔들의자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모호텔 203호실에서 기다린다.빨리 와서 화끈하게 즐기자”등의 경우 분명 음란한 내용임을 알면서도 딱히 트집을 잡기가 어려워 통과시킨다.“왜 얘기한대로 안 보내주냐”며 따지는 사람들 을 설득하는 일도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요즘 10,20대들은.키스하고 싶다'.사랑한다'등은 아무 거리낌없이 남겨요.30,40대로 넘어가면 표현의 농도가 훨씬 심해집니다.” 이렇게 낯뜨거운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는 것은 문자호출기가 지닌 고도의 은밀성 덕택이다.따지고 보면 요즘 세상에 이만큼 보안유지가 잘 되는 통신수단은 없다.우편이야 누군가 뜯어볼 위험이 있고,삐삐 음성사서함의 경우도 비밀번호만 알면 슬쩍 엿들을 수 있지만 문자호출기는 전화로 얘기하는 내용이호출기에 문자로 뜨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주인이 아닌 사람이가로챌 기회가 거의 없다.그래서 거리낌없이 진한 얘기들이 마구쏟아지는 것인데 문제는 중계자인 그녀가 무감 정한 인간이 아니란 점이다.
“저는 매일 수십차례씩 들으면서도 면역이 안돼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얘기를 잘 하는지 모르겠어요.”물론 이런 남녀간의 애정 얘기가 메시지의 전부는 아니다.
오전7~8시엔 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내용이 많다.요즘 모닝콜을 해주는 젊은 연인들이 적지 않단다.10시쯤부터는 물건배달을요청하는 전화들이 잦아진다.주로 가스와 물을 신청하는데 배달을나가 가게를 비우는 동안에도 문자로 주문을 받 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입하는 가게주인들이 계속 늘고 있다.
오전11시~낮12시에는 점심약속이 쏟아지고 오후엔 사무적인 이야기들이 늘어난다.오후3시부터는“저녁에 만나자”는 제의가 많아지고 오후6~8시 저녁시간에는 통화량이 절정을 이룬다.주로 교통사정등으로 인해 약속시간에 대지 못한다는 사연 이다.그리고밤이 되면 술취한 사람들과의 가위질 전쟁이 시작된다.젊은 연인들의 끈적한 사연들이 밀려드는 것도 이 시간대다.가끔씩 린치 계획을 전파하거나 위급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폭력배들의 오싹한 메시지도 들어온다.
약 3개월전 목소리,타자 속도,메시지 축약 능력등의 테스트를치르고 입사한 그녀는 지난번 다녔던 건설회사 업무보다 이 일을훨씬 좋아한다.“사람들 사이의 비밀을 하루에 수백통씩 듣는 것이 무척 재미있어요.매일 비슷한 내용일 것 같 지만 사실은 늘새로운 사연들이 오갑니다.”요즘은 대학 합격.불합격을 알리는 메시지가 많이 들어온다.“합격을 전할 때는 저도 신이 나지만 불합격 사실을 알려야 할 때는 목소리조차 힘이 빠져요.” 이씨는 어느덧 고객들과 감정을 동화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인지 결혼전까지 계속 도우미를 하며 현재 1학년에 재학중인 방송대 영문과 공부를 계속할 작정이다.“아주 가끔이지만 부인에게 따뜻한 사랑의 메모를 남기는 중년 남 성들이 있어요.그사연을 입력할 때면.나도 꼭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할텐데'하며 혼자 웃음짓곤 하죠.”사회의 한모퉁이를 지키는 그녀의 웃음이 문득 푸르게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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