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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영국 여야 학생宿題 논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요즘 영국에선 정치가 얼마나 국민에게 가까이 있는가를 깨닫게해주는 논쟁이 발생했다.영국 여야간에 불붙고 있는.숙제논쟁'이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겐 다소 희극적으로까지 들릴 이번 사태의 앞뒤는 이렇다. 보수당 18년 집권을 마감시키느냐 하는 중차대한 총선을 4개월여 남긴 최근, 차기 수상을 노리는 노동당당수 토니 블레어가 회심(?)의 교육관련 공약을 발표했다.
“최소한 초등학생은 30분씩,중.고등학생은 1시간30분씩 매일 집에서 숙제를 하도록 만들겠다”는게 그 골자다.각 학교에서얼마만큼 숙제를 내줄지를 국가가 정하고 감독하겠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공약이 등장케 된 것은 외국과 비교한 영국 학생들의 학력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영국 학생들의 수학 실력은 형편없다.
지난해 11월 영국에서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 중학생들의 수리능력은 25개 국가중 16위에 불과했다.이런 현상이 처음이 아니어서 이대로 방치하다간 곧 나라가 망할거라는 위기감도 점차 커져갔다.따라서 블레어 당수가 학생들에게 숙제를 보다많이 시키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자 영국의 학부모들은 이 공약을 신선한 해결책이라며 환영했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보수당측은 현직 교육부장관인 질리언 세퍼드를 내세워 전면전에 나섰다.세퍼드 장관은 이틀 뒤 .숙제의양은 각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지 국가가 간섭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포문을 열었다.대신 학생들의 숙제를 쉽게 도울 수 있도록 정부가 학부모 전용 상담전화를 설치하는등 각종묘책을 강구하겠다고 호소했다.
물론 여기에서 어린 학생들의 숙제 문제에 국가가 나서는게 좋은지,자율에 맡기는게 옳은지를 논하자는 건 아니다.
그간 우리에겐 정치라면 으레 권력을 좇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식상한 과정쯤으로 각인돼 있다.파벌정치의 탁류에 휘말려 현실적정책대안 제시와 이에 대한 토론은 고사하고 노동법.안기부법과 같은 민감한 법률,심지어 예산안마저 날치기로 통과되는게 우리의자화상이다.
이런 판국에 우리 야당 당수와 교육부장관이 학생들의 숙제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는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영국에서는 수리능력 고양과 같은 현실생활의 문제점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등에 의해 한 정당의 운명이 갈린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실생활속의 정치, 그것이 바로 영국에서건재해온 참민주정치의 표상임을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남정호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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