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위기 타개의 표적을 디플레로 잡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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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02면

“사람들을 불러모아 땅을 파게 하라. 그러곤 돈을 나눠줘라. 다시 사람들을 모아 땅을 메우게 하라. 또 돈을 나눠줘라.”

1930년대 대공황을 수습하기 위해 미 정부가 펼친 뉴딜 정책을 비판할 때 흔히 인용하는 말이다. 당시 대공황은 디플레이션 때문에 촉발됐다. 물가가 폭락하고 기업 도산, 실업자 폭증으로 경제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은 구제·부흥·개혁을 모토로 자유방임형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을 뜯어고쳤다.

디플레의 망령은 90년대 일본을 할퀸 ‘잃어버린 10년’에서도 반복됐다. 주가는 70%나 떨어지고, 실업률은 2%대에서 5%대로 악화됐다. 일본은 극심한 소비 위축에 시달렸다. 물건 값을 아무리 깎아줘도 팔리지 않아 물가상승률은 여러 차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서운 게 디플레이션’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디플레 공포심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일본에서 경기가 가라앉으며 물가가 급격히 꺾이고 있다. 경제가 정상일 때 물가가 떨어지면 반길 일이다. 하지만 불황 시 물가가 폭락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자산가치 급락과 소비 위축으로 기업실적 악화→고용 감소→물가 재하락의 악순환이 가시화된다. 한국에선 월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월(5.9%)을 정점으로 지난달 4.8%로 떨어졌지만 다행히 디플레 우려 단계는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다.

그러나 디플레 징후가 전혀 없다고만 말하기 힘들다. 원화 환율이 달러당 1500원대까지 올라 수입 물가가 뜀박질했음에도 물가상승률은 떨어지고 있다. 더욱이 우리 경제의 견인차인 수출이 늘기는커녕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내년에도 기대와 달리 무역적자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전망이 나온다. 내수 시장도 쪼그라들고 있다. 3분기 전국 가구의 실질 소비지출이 지난해 3분기보다 2.4% 감소했다. 급기야 정부는 지난달 4%대로 예상했던 내년 성장률을 최근 2%대로 낮췄다. 해외에선 마이너스 성장 예측까지 나온다.

정부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두 달간 수많은 대책을 쏟아냈지만 시장의 불안심리는 증폭되고 97년 환란 때보다 더 어렵다는 신음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디플레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 과감하고 적절한 선제대응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는 내수 경기를 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사회안전망 확충과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기 바란다. 동시에 기업 투자 의욕을 꺾는 규제들을 풀어 민간투자의 불씨를 살려나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돈을 더 풀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디플레 병동’에 입원한 뒤 쓸 치료비보다 훨씬 더 효과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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