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家閥>8.아웅산家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얀마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두개의 별이 있다.
하나는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또 하나는 반독재 투쟁의 화신으로 우뚝 서있는 그의 딸 아웅산 수지다.
미얀마의 독립과 건국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던 아웅산의 일생은 고난과 투쟁,그리고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점철돼 있다.아웅산 수지 또한 88년 민주화 투쟁의 기수로 급부상한뒤지금까지 가택연금과 투쟁을 반복하면서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혈연의 강력한 응집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아시아 여타 가벌들이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선뒤 명예와 재부에 탐닉해 들어갔던 보통의궤적과는 사뭇 다르다.미얀마 아웅산가(家)는 가벌이 가지는 순기능이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아웅산은 미얀마 국민에게 너무 잘 알려진 인물이다.영국이 무책임하게 던져 놓은 식민지의 질곡으로부터 미얀마가 독립의 서광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웅산 개인의 분투에 힘입은바 크다.
1915년 출생해 47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기까지 아웅산의 인생역정은 미얀마의 독립투쟁과 걸음을 같이 했다.
비교적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아웅산은 랑군대에 재학하면서 일찌감치 학생운동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미얀마 민족주의자 양성소처럼 돼버린 랑군대에서 대학생 자치회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연맹을 창립,독립투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는 38년 급진적 민족주의 정당 .타킨'의 서기장으로 선출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이 시기에 그는 전국농민연맹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반영(反英)통일전선 자유연합을 수립하는등 독립운동을 위한 기층조직을 가다듬는데 힘썼다.
아웅산은 40년말 일본으로 건너갔다.일본군과 연합으로 영국군에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전설적인 독립영웅들인.30인의 지사(志士)'를 이끌고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은후 일본군과 공동으로 미얀마에 침투,2개월만에 영국군을 물리쳤다.
영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뒤 미얀마 점령 야욕을 드러낸 일본과의 싸움에서 아웅산의 진가는 다시 발휘됐다.그는 일본의 패색이짙어진 45년 3월 휘하 병력을 지휘,일본군을 패퇴시켰다.
47년 그는 당시 영국 애트리총리와.아웅산-애트리 협정'을 맺어 독립을 성취시켰다.그러나 그는 미얀마의 독립이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을 보지 못한채 같은해 암살당했다.모친은 독립후 인도.네팔대사등을 지냈다.부친이 사망할 당시 두살에 불과했던 아웅산 수지는 19세에 영국에 유학,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그녀가 일거에 미얀마 군부종식및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88년 미얀마가 28년에 걸친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민주화시위로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였다.
모친의 병세가 악화돼 귀국했다가 민주화 현장을 목격한 그녀는갑자기 미얀마 민주화의 기수로 부각됐다.미얀마 희망의 상징이자독립영웅인 아버지 아웅산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심리가 작용했음은말할 것도 없다.
민주화를 위한 아웅산 수지의 힘겨운 투쟁사는 91년 그녀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확정되면서 세계 각국에 잘 알려지게 된다.
가택연금 상태인 아웅산 수지는 요즘도 매주 토요일이면 집앞에서 정례 연설회를 개최한다.그녀에게 투사된 독립영웅 아웅산의 이미지,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미얀마 국민들의 강한 열망이 한데뭉쳐 정부당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연설회는 성황 을 이루고 있다. 영국 유학 당시 영국인 마이클 애리스와 결혼,2남을 두고있는 그녀의 장래는 아직 불투명하다.
간디의 비폭력 노선을 따르고 있는 그녀가 피로 얼룩진 미얀마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새 지도자로 나설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미얀마 대다수 국민들이 그녀를.유일한 희망'으로 여기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유광종 기 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