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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패션으로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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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역사를 싫어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역사 선생님이 싫어서 그랬죠. 지루한 데다 외울 것도 많고 복잡한 전쟁이나 여러 가지 족보 비슷한 것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져 더 싫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내일 일어날 것 같은 일에만 관심이 많았죠. 사실은 우리 모두 어제의 기록인 그 역사 속에 함께 살고 있는데도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 마네, 모네, 미켈란젤로 모두 다 너무 멋있고 기막힐 정도로 대단한 작품을 선보인 예술가지만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생생한 감동과 작가와의 교감 같은 연결고리는 좀처럼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크 퀸(Marc Quinn), 제프 쿤스(Jeff Koons),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낸 골딘(Nan Goldin), 사라 루카스(Sarah Lucas),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같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과 여러 아트 프로젝트를 접하면 살아 있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주목하게 됩니다. 핏덩어리를 얼려 만든 두상 조각으로 충격을 주었던 마크 퀸은 최근에 이 시대의 패션 아이콘인 모델 케이트 모스가 요가를 하고 있는 듯한 요상한 포즈의 모습을 황금으로 제작해 주목을 끌었죠. 제프 쿤스는 한때 성인물 전문 여배우와 함께 촬영한 노골적인 사진 시리즈로 이목을 끌었지만, 요즘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옥상 야외 갤러리에 전시된

번쩍이는 조각상 시리즈로 대중의 인기를 듬뿍 받고 있습니다. 여성 작가이기에 가능한 신선하고 충격적인 작품세계와 통쾌할 정도로 화끈한 언행을 즐기는 트레이시 에민과 사라 루카스. 그냥 사진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의 시’ 혹은 ‘한 권의 시’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낸 골딘의 사진들을 전시장에서 보며 눈물 흘리는 수많은 팬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악동 데미안 허스트. 소 머리를 유리관 안에 집어넣고 벌레가 끓기를 기다리거나 커다란 상어를 수족관에 넣어 통째로 박제를 하고는 예술 작품이라고 말하는 그는 특이한 감각과 특별한 스케일, 비상한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나의 영웅 중 한 명입니다. 얼마 전에는 실제 인간의 두개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조각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해서’가 무려 90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돼 또 한 번 그의 저력과 아티스트로서의 가치를 각인시켰죠. 발 빠르고 영리한 패션계가 그를 가만히 놓아 둘까요? 리바이스가 데미안 허스트의 주목할 만한 최근 작품들을 의상과 접목시

켰습니다. 사실 ‘입을 수 있는 예술 작품’이라는 컨셉트는 절대 새롭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입니다. 최고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현존 작가의 첫 번째 패션과의 접목은, 재미있고 의미 있는 패션 역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상백 (패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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