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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1세기 역에서 또 만나요 ‘지하철 1호선’ 멈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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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하철 1호선’이 멈춘다. 1994년 초연 이후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며 한국 공연계에 새 지평을 연 이 작품은 15년간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품어왔다. 마지막 운행은 2008년 12월 31일, 공연 횟수가 정확히 4000회째다. ‘지하철 1호선’은 90년대 한국 사회가 배경이다. 노숙자·조선족 처녀·운동권 학생 등 여러 인간 군상의 신산스러운 삶을 따뜻하면서도 정교하게 얽어 놓았다.

“새로운 시대 변화를 담아야 하지 않느냐”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연출자 김민기(57·사진) 극단 학전 대표는 “‘지하철 1호선’은 90년대의 풍속도로 남겨 두고 싶다”고 여러 번 공언해 왔다.

그런데 어떤 심경 변화로 갑작스러운 중단을 선언하게 된 걸까.

“올 초 숭례문이 탈 때 제 마음도 잿더미가 됐습니다. 참혹했죠. ‘과거형 기록’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축적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되뇌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렇다면 ‘안주하지 말자, 적극적으로 시대와 소통하자’고 마음을 잡았죠. 그래서 우선 과거형 ‘지하철 1호선’을 접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고 영구 결별은 아니다. 현재 작품은 끝내지만 새로운 ‘21세기 버전’을 준비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제목만 같고 안의 내용물은 몽땅 바꾼다. 시기 역시 불투명하다. “15년간 붙잡고 싸워왔는데 쉽게 그 기억을 털어내겠어요.”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지하철 1호선’을 지탱해 온 뿌리다. 1994년 초연 때 모습(작은 사진)과 최근 공연 모습. [극단 학전 제공]


그래도 김 대표의 말 갈피에선 언뜻 그림이 짐작됐다. “지금은 조선족 처녀 ‘선녀’라는 외부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의 풍경입니다. 미래는 한 명이 아닌, 오르한 파무크의 문학작품처럼 여러 명의 시각을 교차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비정규직·88만원 세대·인터넷 세상 등의 단어도 거론했다.

15년간 ‘지하철 1호선’을 거쳐간 배우는 무려 200명. 무명의 배우가 작품을 통해 스타로 성장한 경우가 잦아 ‘배우 사관학교’로 불린다. “11명의 배우가 80여 가지 배역을 소화해야 합니다. 주인공을 정점에 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모든 배우가 주인공인 평등적·다층적 구조입니다. 캐릭터 간의 호흡을 중시하면서 저절로 훈련이 되는 거죠.”

연출 방식 역시 독특하다.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노래든 대사든 음가의 최대치를 정확히 내는 게 기본입니다.”

그는 따로 ‘이렇게 연기하라’고 시범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배우마다 신체 구조가 다릅니다. 대사가 왜 이런지, 왜 이런 감정이 분출되는지 역시 배우가 이해하고 납득하고 체화해야 합니다. 저는 그 이면의 시대적 상황 등을 이해시킬 뿐이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우리 연습하는 걸 보면 근·현대사 전공 수업 같다’고요.”

잠정 중단을 선언한 ‘지하철 1호선’은 20일부터 과거에 출연했던 화려한 멤버들로 ‘드림팀’을 구성, 연말까지 40여 일간 마지막 불꽃을 태울 예정이다. “처음 봤을 땐 다들 솜털 보송보송한 처녀·총각이었는데…. 사람 마음이 그렇더군요. 스타가 된 극소수의 배우들보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대다수의 후배가 눈에 밟혀요. 마음이 아릴 뿐입니다.”

최민우 기자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독일 그립스 극장의 음악극 ‘Linie 1’이 원작이다. 제목과 주제 의식만 똑같을 뿐 음악·캐릭터·대사를 모두 한국적 상황으로 탈바꿈시켜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에게서 “원래 작품보다 더 뛰어난 번안극”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제2의 창작’이라는 의미로 저작권료도 내지 않고 있다. 94년 초연 이후 조금씩 업그레이드돼 온 작품은 2000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상황으로 고정돼 왔다. 6개월 단위로 배우·스태프를 변경하며 국내 최장기 뮤지컬 작품으로 기록돼 왔다.


나에게‘지하철 1호선’은

◆설경구(1994년 초연 멤버)=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방황했던 때였다. 김민기 선생님의 권유로 오디션 없이 대단한 특혜를 받고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했던 작품이다. 숨가쁘게 일인다역을 하며 관객과 함께 웃고 울었다. 첫 스타트를 끊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뭉클하고, 감사하다. 지금도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근데 가슴이 아리다.

◆나윤선(초연 멤버)=전환점이었다. 내 인생은 둘로 갈라진다. 지하철 1호선 ‘전’과 ‘후’다. 김민기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난 “하면 될까?”에서 “하면 된다”의 인간형으로 바뀌었다.

◆황정민(95∼96년 출연)=늘 생각나게 하고, 늘 행복하게 하고, 늘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내 작업의 기본이다.

◆이황의(1322회 최다 출연 배우·현 조연출)=2002년 결혼했다. 토요일 오전에 후다닥 결혼식 올리고 곧바로 극장으로 달려갔다. 예식장에서는 턱시도를, 무대에선 거지 옷(노숙인 ‘땅쇠’ 역)을 입었다. 그날 객석엔 나의 신부가 앉아 있었다.

◆이인권(1251회로 최다 출연 연주자·현 색소폰 연주)=숱하게 한 공연 기억보다 왜 난 딴 생각이 날까. 무대감독 눈을 피해 우린 무대에서 족구를 했다. 혼자 하면 독박이다. 경구형·정민이형이 공범이었다. 그래도 다른 극단과의 시합에서 이겨 10만원을 따내 회식을 하기도 했다. 우리끼린 노는 게 아닌 ‘치열한 몸 만들기’라고 불렀다.

◆조승우(2001년 출연)=이제 갓 무대에 선 꼬마 배우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김민기)가 주신 선물이다. 작품을 통해 인간을 느꼈고, 창조력을 배웠다. 참, 할아버지는 돈도 주셨다. 출연료 이외에 매진이 될 때엔 모든 배우에게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셨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으면 한 달에 3만원. 그 어떤 개런티보다 지금까지 기억되는 소중한 돈이다. ‘지하철 1호선’과 함께 난 몸도 마음도 부자가 됐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기는 모두 그때 배운 것을 써먹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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