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의문화유산>남한산성 장승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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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목조건물이 많고 역사의 부침이 심했던 우리나라는 장구한 역사에 비해 화려한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그러나 강산 곳곳에는 소박한 정서가 담긴 문화유산이 적지 않으며 대부분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숨겨져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가본다.<편집자註> 지금은 비록 남한산성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시민들의 가벼운하루 행락지로 변해 어수선한 곳이 되었지만 축성 양식과 역사적의미로 본다면 결코 가벼운 행락지로만 여길 수는 없다.
특히 남한산성 주변에 숨은 보물처럼 서 있는 나무장승들을 찾아본다면 하루 다리품이 더 보람차다.
마을이나 절 어귀에 서 있는 장승을 가리켜 풍상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온.민중의 자화상'이라고 한다.대체로 남녀 한쌍인 장승은 눈을 부릅뜨고,입을 헤벌리고,주먹코에,이빨은 삐죽한 모습으로 서서 풍년이 들게하고,돌림병도 쫓아주었다.아 무렇게나 깎고 쪼은 나무나 돌에 불과하지만 삶의 희망과 애환이 간절하게 담겨졌던 것이다.장승의 기원을 찾자면 선사시대 원시신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장승의 개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을 공동체 문화 속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전국 곳곳에 있던 수많은 장승들은 어느새 산업사회가 되면서 미신으로 치부돼 사라졌으며,농촌에서도 장승이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차라리 무슨무슨.가든'의 문지기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다.이런 상황이지만 남한산성 주변인 경기 도광주군중부면.초월면.퇴촌면 일대의 검복리,엄미리,하번천리 양짓말,서하리안골.사마루,무갑리,관음리,우산리 등지에 가면 원형대로 이어온올곧은 장승문화를 만날 수 있다.
엄미리 나무장승은 몇 차례의 자귀질로 눈.코.입을 조각해 간결하면서도 사뭇 강렬한 인상을 준다.그 단순명쾌함은 현대적인 미감에 더 가까울 정도다.하번천리 양짓말 장승은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며 미소짓고 있는 보기 드물게 명랑한 표정 .무갑리 장승은 앞의 두 장승과 달리 씩씩하고 당당하다.아니 사납다고나 할까.이들 장승은 솟대와 어우러져 있으며,솟대 역시 장승과 같은 역할이다.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가운데 서 있는 장승은 석양무렵의 농촌 마을을 더 정겹게 한다.
이곳 나무장승들은 대개 2년에 한번씩 새로 깎아 묵은 장승 곁에 함께 세워진다.
세상이 달라지고 마을 공동체 문화가 해체됐지만 그래도 장승을찾아나선 길에는 마음 한켠에 늘 자리하는 고향을 찾아가는 향수가 있다.그렇더라도 변화된 이 시대에 살아 숨쉬는 새로운 장승문화의 출현에 대한 기대는 가능하지 않을까.
※남한산성에서 나와 34번 국도를 따라 하남으로 가다 엄고개마루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엄미리 장승이 나온다.경안인터체인지 옆으로 난 184번 군도로를 따라가면 차례로 하번천리 양짓말.서하리 안골.사마루 장승,그리고 경안천 건너 계속 가면 무갑리 장승이 나온다.
글=김효형〈한국문화유산답사회총무〉.사진=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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