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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미군 차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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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만약 사회주의 국가였고,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였어도 냉전이 존재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냉전의 원인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 양극체제 때문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가상사실(counterfactual)을 활용한 이론화 방법이다.

이 질문은 중국과 소련, 베트남과 중국이 전쟁을 통해 영토분쟁을 해결한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국가 간의 갈등이나 전쟁이 반드시 이데올로기와 상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때문에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였다 해도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했을 수 있다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지고 냉전은 이데올로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적 세력균형과 역학관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사실과는 다른 가정을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이론적 실험은 국제정치뿐 아니라 역사의 영역에서도 존재했다. 그중 유명한 것이 파스칼이 말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로마의 운명이 바뀌었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최근 주한미군 2사단 일부 병력이 이라크로 차출돼 가는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미군 철수의 신호탄이라며 안보불안감을 강조한다. 또 현 정부가 반미주의를 부추겨 미국의 신경을 거스른 결과로, 미국이 파병 등을 질질 끄는 노무현 정부에 본때를 보여주려 한 실력행사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면 반미주의도 없었을 것이고, 한.미관계도 순조롭고, 우리가 빨리 파병했다면 2사단 차출도 없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가상사실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이런 가상은 한국이 미국을 도와 월남에 파병했던 1970년대 초, 한국 내각이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내각 총사퇴 결의를 진행하는 등 미국에 갖은 호소를 진행했음에도, 미국이 자신들의 세계전략에 따라 주한 미 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 병력을 철군한 예에 이르면 논리적 타당성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이다. 하지만 동맹이라 해도 국익과 전략의 우선순위에서 차이와 갈등은 존재한다. 또 동맹의 효과는 군사적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국의 세계전략이 바뀐 상황에서 한.미동맹의 군사적 효과를 미군 전력의 강화와 연합전력 및 대북 억지력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병력 숫자에만 집착한다면 우리의 주장은 억지를 넘어서는 우물안적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