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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신춘중앙문예 당선소감-단편소설 "향기와 칼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서울 근교에 갑작스런 겨울 소나기가 내렸다고 한다.그리고 내방에서도 크르릉 천둥같은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때아닌 장대비였다.긴 겨울이 가고 날이 풀리면 내릴 줄알았던 비가 너무 이르게 내리는 건 아닌지….
당선 통보를 받고 한동안 소낙비 탓에 온몸이 추워졌다.우산없이 걸어야 할 길이 지평선 너머로 아득한 것같다.무엇을 쓸 것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과 함께 한 짧은 단편이 생각났다.
1백년전 쓰여진 유명 소설가의 미발표작이다.얼마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여 호기심에 집어든 책이었는데 수록된 작품중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한 장면이 있다.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사내가 밤중에 그녀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를 찾았다.달도 없는 밤,그는 그곳에서 이상한 체험을 했다.묘지를 열고 나온 한 시체가 자신의 비문을 지우고 고쳐 쓰는 것이 아닌가.둘러보니 모든 무덤들이 열려 있고 망자들이 일제히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고쳐 쓰는 것이었다.그 내용들은 모두 비문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그들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진실은 죽은 자의 영혼까지도 깨울 수 있는 것인가.지워지지 않을,다시 고쳐쓰는 일이 없는 진실을 쓰고 싶다.화장하지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새벽 관절염의 통증 속에서도 딸을 위해 매일 기도를 쉬지 않으신 부모님과 1년동안 글쓰기에 신열을 앓았던 토요회 식구들,모교인 숭의여전 문창과의 오늘의 영예를 안겨주신 나의 스승 김양호 선생님,김상렬 선생님,부족하고 흠 많은 작품 을 너그럽게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은현희 ▶71년 전북정읍 출생▶92년 숭의여자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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