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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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여 아라한이 된 연화색니(蓮花色尼)는 아니라도 수도하듯 살아온 반생을 이제금 돌이키지 않을 수없다. 물욕(物慾)엔 원래 담담한 편이었지만 지식욕만은 왕성하여 그 덕에 사업을 무난히 이끌어올 수 있었다.
성욕(性慾)에도 비교적 덤덤하여 크게 고통스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따금 자위(自慰)의 충동을 느꼈다.손사막에 의하면 이것이 수명을 손상하며 백병이 생기는 근거라 한다.그러니 어쩌겠는가.성욕은 영육(靈肉)을 함께 갖춘 인간의.업( 業)'과도 같은 것이요,아무하고는 결코 얼릴 수 없는 성미와 처지인 것을…. 계속 길어올리지 않으면 우물은 말라붙는다.애초에 아리영과아리영 아버지,그리고 정길례여사와 함께 둘러본 정읍(井邑) 황토현(黃土峴)기슭의 초기 철기시대 우물에서 그것을 실감했었다.
삼국시대말 때만 해도 물이 풍성했다는 우물은 앙상하 게 메말라있어 연화색니의,아니 을희 자신의 은밀한 곳을 보는 느낌이었다.그 우물터에서 여기까지 왔다.
아리영 아버지와 정여사의 만남.그리고 아리영과 큰아들과의 만남.모두 우연인 듯하나 필연적인 우연이다.
아리영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정여사는 이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러나 만난 이상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필연'이다.아리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그래서 회임(懷妊)도 하게 된 것인가.이에 더한.필연'의 증거가 어디 있 겠는가.
시월 상달에 식을 올렸다.두사람의 재혼식이다.임신 3개월을 넘긴 아리영의 사정도 감안하여 집안 식구와 절친한 친구끼리 아주 단출하게 치렀다.
북악산이 보이는 작고 아늑한 호텔.아리영 아버지가 단골로 다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겸하여 차려졌다.
.혼례(婚禮)'는 원래.혼례(昏禮)'라 썼다.어두울녘에 올리는 예식이라 해서 이렇게 불린 것인데,쪽빛 북악산이 유리창 가득히 박힌 방안에 일렁이는 촛불은 아리영을 더할나위없이 우아하게 비춰냈다.짤막한 면사포로 살짝 가려진 그녀의 옆 모습이 환상처럼 감미했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리영(娥利英)왕비도 저런 미인이었을까요?” 작은 아들의 장인인 고교수가 옆에 앉은 을희에게 감탄하듯 말을 건네자 뒷자리의 나선생이 대신 응대했다.
“박혁거세왕도 저 신랑처럼 멋쟁이였을까요?” 조촐한 잔치답게조용한 웃음꽃이 피었다.예약해둔 호텔 방에 신혼부부를 바래다주고 문을 나섰다.왠지 마냥 허전했다.길고 화려한 연꽃 무늬의 복도 양탄자가 을희의 지나온 길처럼 멀었다.
그 복도 끝에 나선생 모습이 꿈인듯 보였다.
〈끝.관계기사 15면〉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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