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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사로잡은 플레이보이 모델 이승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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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미국의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사가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란제리’(Lingerie)지 9,10월호는 ‘플레이보이 역사상 가장 잘 팔린 호(號)중의 하나’로 꼽힌다.거기에는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스유니버스가 된 바네사 윌리엄스나 임신한 데미 무어처럼 화제가 되는 인물이나 금발의 팔등신 누드가 표지로 실렸을 법하다.왜냐하면 미국 성인잡지의 표지모델 선정기준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표지에 등장한 인물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한번도 주류 연예계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그것도 까만 머리,까만 눈의 동양인이었다.그녀가 바로 1m63㎝의 키로 장신의 글래머들이 지배하는 누드모델 세계에 아시안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재미동포 이승희(26·영어표기 Sung Hi 때문에 지금까지‘성희’로 와전)다.

순수 아시안으로는 처음 플레이보이 표지모델이 된 그녀의 인기는 최근 몇달새 폭발적인 상승세를 타고 있다.인터넷 가입자들이 뽑는 ‘누드모델 베스트5’에서 그녀는 4위 데미 무어를 제치고 3위에 올랐다.사진을 싣고 있는 사이트만 20여곳.팬클럽은 생긴지 두달만에 3만여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93년 ‘란제리’지에 처음으로 누드사진을 실은지 불과 3년만에 정상을 정복한 셈이다.그러나 그녀에게 누드모델은 유년의 꿈도 아니었고 미래의 자화상도 아니다.

LA의 한 광고회사 스튜디오를 빌려 인터뷰를 가진 15일은 햇볕이 따사로운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의 겨울 날씨였다.화장기 없는 얼굴로 반팔 T셔츠에 얇은 재킷을 걸치고 나타난 그녀는 꽃밭에 물을 주다 달려온듯 했다.“아이구 안녕하세요.좀 늦었죠.” 정확한 한국말로 인사하며 들어오는 모습도 제 방문을 여는 품새였다.이후 세시간 동안 그녀는 어떤 질문이든 빼지 않고,더듬거리지 않고,비틀지 않았다.신이 나면 쿵푸를 하듯 큰 제스처와 하이 톤의 웃음을 섞어가며 참 많은 말을 했다.사철 태양열을 먹고 사는 열대의 무희 같은 첫 인상.굴곡이 많았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

7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두살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여덟살까지 남동생과 함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이때 무슨 꿈을 지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나이팅게일이나 유관순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같다.다만 엄한 사랑을 베풀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만 강하게 남아 있다.78년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와 공부를 열심히 했다.덕분에 오하이오주립대학 의대 예과과정 3년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그러던 어느날 의사의 길을 버리고 패션모델이 되기 위해 짐을 싸 뉴욕으로 날아갔다.

“사람 몸에 관심이 많았어요.스포츠 전문의를 하고 싶어 의대를 갔는데 꽉 짜인 의대공부가 점점 싫증이 났어요.거기다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CF와 캘린더 모델을 하면서 내가 쉽게 돈 벌 수 있는 방법과 재미를 알게 됐고 이후 점점 모델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어요.” 그러나 1m80㎝가 넘는 장신들이 버티고 있는 뉴욕의 패션모델계에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뉴욕에 있으면서도 일거리는 주로 LA에서 왔다.물론 CF·캘린더와 누드모델이 주종이었다.1년6개월을 LA와 뉴욕을 오가던 그녀는 마침내 누드로 노선을 바꾸고 LA로 돌아온다.한국사람은 누드를 유난히 꺼리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아버지는 불과 한달전 한인신문에 난걸 보고야 아셨어요.‘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지금도 걱정을 많이 하세요.저는 부끄러움 같은 건 전혀 없어요.플레이보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찍는 포르노잡지와 달리 여성의 아름다움 자체를 살려줘요.그래서 제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영화로 나갈 수 있는 기회도 되고요.”

그녀는 영화배우를 꿈꾼다.플레이보이를 거쳐간 브리지트 바르도·리즈 테일러같은 스타들이 그랬듯 누드모델은 발판일 뿐이다.그 꿈은 이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지난해 한국에서 촬영한 펄 벅 원작의 ‘흔들리는 갈대’(The Living Reed)에 조연으로 캐스팅돼 오랜만에 고국을 다녀갔고 올들어서는 할리우드 영화사들로부터 출연섭외가 잇따르고 있다.그중 내년 5월 촬영에 들어가는 ‘프리 폴’(Free Fall)의 주인공인 여자 킬러역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지금 연기학교에 다니고 있다.누드모델 이미지를 업은 에로물 출연은 다 거절한다.배우로 자리가 잡히면 누드는 작별이다.새로운 자리를 찾아 천막을 치는 유목민처럼 그 자리에 몸을 풀고 나면 떠나온 곳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낙천적인 기질 때문일까.그녀는 앞으로 배우로 성공해도 그 명성에 집착하지 않을 거란다.그럼 지금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자 반사적으로 ‘가족’이라고 한다. “열다섯살 때부터 독립해 살았어요.돈벌이나 사회적 성취는 자신을 책임질 만큼만 하면 돼요.하지만 감정문제는 나 혼자 안되잖아요.누구에겐가 의지해야 하는데 가족밖에 더 있겠어요.”

그녀는 요즘 아기만 보면 ‘배고’싶다고 한다.빨리 결혼해 적어도 2~3명의 아이를 낳고 입양도 하고 싶다.아기 낳으면 몸매가 무너질텐데 괜찮냐고 하자 “모델 안해도 된다”고 한다.그녀는 무엇을 하든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그녀에게 어머니의 원형은 할머니다.두살때 헤어진 엄마는 미국에서 유능한 비즈니스 우먼으로 성공했다.그녀는 16세와 21세때 두번 엄마를 만나고 그 후론 못봤다고 한다.

88년 암선고받고도 새벽에 일어나 가사를 돌보던 할머니는 마돈나와 함께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성공한 여성 마돈나’와 ‘헌신적인 사랑을 가르쳐준 할머니’는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두 기둥이다.

미국에 간지 18년 됐지만 아직 한국국적을 고집하는 ‘꼴통’.시민권이 없으면 불편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투표할 수 없고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 외에는…”이라고 답하는 재담가.불고기집에서 남자의 1.5배를 먹어치우는 대식가.CF를 보고도 잘 우는 감상적인 소녀.그러면서도 플레이보이 관계자들이 ‘베리 인터렉철’(매우 지적)이라고 입을 모으는 알 수 없는 여자.

이틀이란 짧은 만남에서 바라본 그녀는 변화무쌍했다.쨍쨍한 햇빛 사이로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활짝 핀 웃음 위로 눈물을 찍어내고,우울한 회상의 한가운데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지만 견제도,집착도 없이 살고 싶다”고 한다.내년 5월 문학세계사에서 라이프스토리가 출간되기 직전 그녀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다.[LA=남재일 기자]

이승희가 밝힌 자신의 모든 것

◇몸매:33-22-33.5.키 1m63㎝.몸무게 48㎏.아쉬운 점은 “다리가 좀 길었으면.” 성형수술은 젖가슴만 모양 다듬는 수술.다른 모델은 대개 확대수술 하지만 체구를 감안해 크기는 거의 그대로 두었다고.

◇몸매관리:1주일에 3~4번은 웨이트트레이닝을 1시간30분 정도하고 두번은 워킹·사이클·에어로빅등을 번갈아 가며 2시간씩 한다.음식은 가리지 않고 양도 조절하지 않는다.배부를 때까지 먹는다.담배도 하루에 한갑 넘게 피운다.술은 위스키 한병도 마실 수 있지만 많이 마시면 ‘너무 철학적이 돼’자제하는 편.잠은 무슨 일이 있어도 8시간씩 잔다.

◇좋아하는 남자:움직임이 없는 전형적이 미남은 아무런 감정을 못느끼고 대화해 안통하면 못생겨 보인다.일단 두뇌회전이 빨라야 하고 감성적이며 나를 잘 웃겨주는 남자가 좋다.돈 같은 건 필요없다.“내가 사람에 대해 너무 욕심을 많이 내는 건가.”

◇결혼:아버지는 한국 남자와 하길 원한다.하지만 요즘엔 내 성격을 생각해 미국인도 괜찮다고 하신다.미국남자가 여자를 보살펴주는데 더 세심한 것같다.지금 남자친구가 25% 인도네시아인의 피를 물려 받은 미국인인데 이해심이 많아 좋다. 아직 결혼은 모르고,연애는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섹스어필:섹시하다는 말을 듣는게 어색하다.사람은 뜯어보고 느끼면 제나름대로 섹스어필한 면이 있다.나는 이상하게도 재기발랄한 사람을 보면 그런 감정을 느낀다.배우중에는 숀 코너리와 브래드 피트가 섹스어필하다.

◇모델이 아니면:그림을 그린다.어떤 우연이 있었다면 지금 화가지망생이 됐을 수도 있다.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는 작가도 부러웠다.조직생활은 못했을 것같다.

◇가족: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있다가 이민간 이대권(63·사업)씨의 1남1녀중 장녀.현재는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에서 애완견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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