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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원작자 사라마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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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여러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만족하나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낙관론과 비관론의 끝없는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우리에게 가장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여기서 삶을 변화시킬 만큼 진지한 답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포르투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주제 사라마구(86·사진)의 말이다. 자신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의 국내 개봉(20일)을 앞두고 이메일 인터뷰에 응했다.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기술학교를 다니는 틈틈이 문학수업을 했고, 자동차 정비공·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50대 중반에야 전업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에서 떨어져 나와 대서양을 떠돌게 된다는 설정의 ‘돌뗏목’(86년작)을 비롯,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상상력과 인간문명의 본질을 포착하는 통찰력을 동시에 발휘해왔다. 9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95년작) 역시 우화적 특징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갑자기 눈이 머는 증세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기이한 상황을 배경으로, 격리수용된 인간들의 천태만상과 새로운 권력에 비이성적으로 휘둘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물론,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이름도 없다. 안과의사, 의사의 아내, 맨 처음 눈이 먼 남자 등등으로 지칭될 따름이다. 작가는 “내 소설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우리는 은행카드번호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번호가 된다”는 말로 현대사회의 익명성을 지적했다.

주인공은 ‘의사의 아내’(줄리언 무어)다. 눈이 멀지 않았음에도 남편을 따라 수용소에 합류한 뒤, 온갖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그녀는 눈이 보인다는 장점을 통해 남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하는 대신 주위 사람들을 은밀히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나중에 수용소를 장악하는 남성중심의 권력과 대립항을 이룬다. 작가는 “그 역할에 남자를 대입시키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의사의 아내’는 그의 또 다른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2004년작)에도 등장한다. 유권자들의 절대다수가 선거에서 백지투표, 즉 무효표로 의사표현을 하자 당황한 정치권력이 극단적 강압책을 동원하는 줄거리다. 작가는 “우리가 ‘국익’이라고 일컫는 것이 종종 중대한 과오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그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는 것이 효과적이었다”며 “속편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작가는 현재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에 살고 있다. 90년대 초 소설 ‘예수의 제2복음’으로 일대 풍파를 겪은 뒤 포르투갈을 떠났다. 예수를 자신의 소명에 회의를 품은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낸 이 작품은 카톨릭 교회와 보수파 정권의 큰 반발을 샀다. 그럼에도 작가는 “모국어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같은 작가가 결코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포르투갈은 내 조국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나라’와 ‘정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브라질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감독을, 할리우드의 연기파 줄리언 무어가 주연을 맡는 등 다국적으로 제작됐다. 올 봄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을 당시 평론가들은 인색한 평가를 내렸지만, 원작자는 너그러웠다. “영화화가 갖는 각색의 자유와 원작에 대한 충실도를 모두 만족시켰다”며 특히 줄리언 무어에 대해 “전세계 모든 영화제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케파 헤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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