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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음모의 계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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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병자호란이 끝나자 신흥대국 청(淸)나라는 조선의 두 왕자와 정치인들을 볼모로 잡아 선양(瀋陽)으로 데려간다.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국제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며 많은 것을 배운다.9년여 볼모생활을 마친 소현 세자는 귀국3개월만에 여름철도 아닌 4월에 학질에 걸려 나흘만에 급사한다.그의 죽음은 병사였는가,아니면 독살이었는가.
소현세자의 의문사를 역사추리로 추적하는 박안식의 소설.소현세자'는 친청(親淸)개혁세력인 소현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친명(親明)수구세력의 독살이라는 음모정치의 극치를 역사적 고증과 정황복원작업을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대권을 둘러싼 수구와개혁세력간의 갈등과 대립,끝없이 되풀이되는 음모.배신.야합의 드라마가 궁중 구석구석에서 배어난다.
17세기 아닌 21세기 목전에서 우리 정치사는 어떤가.최근의몇가지 사례만으로도 음모정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그 하나가이순자(李順子)여사의 회고록중 6.29관련 부분이다.“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6.29선언은 그분 통치의 꽃이다.6.29는그분에게 있어 권력으로부터 하산작업의 절정이다.자신이 서있던 권력 정상에 후계자를 남겨두고 권력의 휘장 밖으로 단숨에 퇴장했던 정치드라마의 백미다.” 李씨 스스로 6.29를.全통'이 기획.연출하고.盧통'이 주역을 맡은 한편의 정치드라마였다고 했다.아직도 우리는 음모정치를 정치드라마로 보고 있다.
91년 말,5공(共)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이.6.29는 全씨작품'이라 쓴 회고록에 대해 나는 .6.29 가로채기'라는 글로 비판한 적이 있다.6.29는 민주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항쟁 대가로 받아낸 항복문서지.盧통'이나.全통'의 공 적이 될 수 없다고 했다.그러나 이순자씨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민주세력에 밀려 막바지 위기에 이른 통치자가 잔명(殘命)을 잇기 위해 어떤음모를 세웠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폭압정치에 대한 한줌의 반성이나 회한(悔恨)도 없이 어떻게 하면 극적인 연출을 통해 위기국면을 탈출하고 무사히 청와대를 빠져나가느냐는 음모와 전술이 이 회고록에서 엿보인다.
.盧통'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 .全통'은 얼근히 취해 돌아와“여보,이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거요”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들 음모와 전술이 얼마나 맞아떨어졌길래 그토록 행복해했을까 하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국민을 상대 로 기만과 음모를 밥먹듯 하고 국민을 상대로 전쟁 치르듯 전술.전략에 급급하는 정치가 5,6공으로 과연 마감된 것인가.
바야흐로 정치계절이다.만나는 사람마다 밤낮 헛바퀴도는 대권주자 이야기고,신문마다 예상후보 인터뷰가 신물나게 등장한다.공조를 다짐하는 야당 두 지도자가 망년회를 겸한 단합모임에서 흘러간 노래를 열창하고 있을 무렵,한 지도자의 핵심이 배신해버린 탈당사태가 일어났다.도지사와 시장,2명의 국회의원이 몽땅 빠져나가는 대형 배신사태가 일어난 것이다.당사자는 야당으로는 지방행정을 수행할 수 없다는 변명이지만 공작정치의 일환이라는 비난이 드높다.확실한 증거가 없어 누구나 입다물지만 산전수전 험한세상 살아온 우리로서는 아! 음모의 정치계절이 시작됐구나 하는감을 잡는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다 했던 3당합당도 음모와 전술에 따른 구시대적 정치게임이었다.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두 야당이 대권을 앞두고 공조와 연대를 한다는 것도 결국은.6.29는 그분 통치의 꽃'이라는 음모적 수사학 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본다.권력을 잡기 위해선 적과 동지,정책과 이념을 가리지 않겠다는 발상이나 권력의 정상에서 무사히 하산하기 위해선 항복문서를 드라마처럼 연출할 수도 있다는 전술과 무엇이다른가. 나는 3金시대의 종언이 진정한 민주화시대의 개막이라고본다.그들의 경륜과 노회한 정치수법에 감탄하면서도 결국은 그들이 싸우면서 배운 정치적 음모와 전술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이들이 정권을 계속 장악하는 한 21세기의 우리 정치는 조금도달라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국민을 상대로 정책과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막후의 음모와 야합으로 일관하는 여당과 야당의 속성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全통'과.盧통'을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음모의 정치로 권력을 잡는 한,국민은 그 지도자를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분명한 진리를 정치지도자라면 이젠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논설위원) 권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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