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게 인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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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34면

어린 시절 솔직히 나는 클래식보다 팝 음악이 좋았다. 록에도 관심이 있었다. 유학 가기 전 대학 시절에는 워낙 끼가 많아 가수 흉내를 내며 재즈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는 클래식이었지만 팝에서 느끼는 또 다른 열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낸 앨범 ‘미싱 유(Missing You)’는 4년 만에 낸 비(非)클래식 음반이다. ‘베사메 무초’ ‘도나 도나’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들어있다.

나는 평소 클래식 음악을 들려 줬기 때문에 4년마다 다른 장르의 앨범을 내곤 한다. 그런데 반응이 좋다. 2000년 뮤지컬 음악을 내 방식으로 불렀던 ‘온리 러브(Only Love)’가 판매량 100만 장을 넘겼던 것처럼 이 앨범도 청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

나는 오페라 출연 횟수를 줄이는 중이다. 어느날 하루는 뉴욕에서 ‘라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가 됐다가, 다음날 보스턴에서 ‘리골레토’의 질다가 되고, 다시 뉴욕으로 와 루치아가 되는 일에 문득 지쳤기 때문이다.

20년 전 이탈리아에서 데뷔한 이후 집에 와서 가방에 옷만 바꿔 넣고 다시 떠나는 일이 반복됐다. 1년에 30일 정도만 집에서 지내고,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내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책·영화처럼 좋아하는 것을 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연주에 ‘찌들어’ 사는 기분이었다.

데뷔 초기 ‘이름을 빨리 날리는 데 좋은 오페라 배역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약해지고, 요즘엔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아주 새롭고 흥미로운 오페라, 새로 공부해 보고 싶은 오페라의 배역 제의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오페라 출연을 줄이고 있다.

그 대신 나는 내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무대에 서는 횟수를 늘렸다. 이달 초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매드 포 러브(Mad For Love)’ 공연을 했다. 도니제티·벨리니·토마의 오페라 가운데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여인이 나오는 장면만 모아 부르는 독창회였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중 ‘아! 믿을 수 없어’, 루치아가 부르는 ‘그대의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오네’ 등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사랑과 광기, 집착과 열정을 한 무대에서 보여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주제인 사랑의 노래인 만큼 청중과의 공감이 쉬웠다. 2003년 서울에서 같은 제목으로 공연한 후 그 기억이 좋아 다시 공연한 것이다. 12일에는 도쿄 산토리홀에서 같은 주제로 공연한다. 12월 한국 공연에서도 ‘케 세라 세라’ ‘엄마야 누나야’ 등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곡을 노래할 것이다.

이런 무대에선 내 감정과 끼를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 노래할 때 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내가 된다. 요즘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결국 노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래에 승부를 건 여자다. 그리고 사랑 노래, 그리움에 관한 음악은 감춰 놓았던 나의 열정과 어린 시절의 끼가 뿜어져 나오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숨겨 놓은 면을 보여줄 때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인다. 나는 이번 앨범에서 파격적인 면을 보여주려고 했다. 클래식 무대에서 입던 드레스 대신 재클린 케네디풍의 원피스를 입고 텅 빈 공항에 앉아 여행을 준비하는 컨셉트의 사진을 찍어 앨범 재킷에 넣었다. 그리고 지구촌을 다니며 느꼈던 외로움과 고향·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에 불어넣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항상 이별하며 살았던 나의 삶에 대한 노래였다.

사람들은 내게 화려한 프리마돈나의 삶을 기대하지만 사실은 모든 익숙한 것과 헤어지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이다. 어느 곳에 가서 누구를 만나도 먼저 헤어지게 되는 생각부터 하는 게 습관이 됐다. 서울을 떠난 지 25년이나 된 것도 그리움을 키우고 있다.

사람에겐 누구나 그리움과 사랑이 있다. 음악은 사람들의 감정을 그윽이 건드리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노래만 한 게 아니라 선곡·편곡·사진 등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듣고 뜨거운 감정과 그리움, 아련한 슬픔 등을 느낄 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다정한 연인이 되다 상냥한 누나가 되고, 아픔을 나누는 친구도 되는 게 음악이다. 장르 구분은 무의미하다. 나의 활동 폭은 점점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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