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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씨 부인 최현실씨가 밝힌 脫北 경위-김경호씨 一家 회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92년8월 부모님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이후 편지와 사진을 수십차례 주고 받았다.금년 7월 중국에 나온어머니(최정숙)가 인편으로“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48년만에만났다.어머니는“지옥에서 어떻게 사느냐.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아느냐.한국의 어디로 가라”고 애타게 권유했다.그러면서 어머니는“가족중 빨갱이 물이 들어 탈출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지”라며 걱정했다.나는“자식들을 믿을 수 있다”고 다짐했다.어머니는 안도하면서“일단 두만강을 넘어라.그러면 뒤처리는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을 모아 놓고 탈출의사를 밝혔다.자식들은“부모님 의사를 따르겠다.고향에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소원을 들어주는 게 여기서 할 수 있는 효도라고 생각한다”며 적극 동감했다.다만 사위들이 동참할지 걱정이 됐 다.그러나.우리 부부 같이 또 헤어져 사는 고통을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딸더러 권유해 보라고 했다.
다행히 사위들도 동의했다.그래도 이번 일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사위.며느리들을 불러 놓고“이제라도 결심을 바꿔도 좋다”고 했다.그들은 모두“우리도 인간이다.인간답게 살겠다.지금과같은 실정의 북조선에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면서 동참했다.
가족들의 탈출결의가 확고히 서자 10월20일 장남 금철이를 친구이자 사회안전부에서 일하는 최영호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토록했다.영호가 고민끝에 도와 주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호는 두만강을 건넌 후 중국땅에서의 안전지역 확보를 위해 장남과 차남(성철)에게 먼저 중국에 들어가 이를 확인해 보라고했다.영호는 이 문제가 해결되자“10월26일 새벽에 두만강을 건너겠다”는 최종연락을 해왔다.10월25일 오후 8시 온 식구가 장남집에 모였다.이동중 어린애들이 소리를 낼까 걱정이 돼 잠자는 약을 먹이고 짐속에 넣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혹시 짐속에 있다가 발각되면 더 곤란하다고 판단해 약을 먹이지는 않았다.거동이 불편한 남편이 사위 2명,3녀 아들(박현철)과 함께 20분 먼저 집을 나섰고 이어 2개조로 나눠두만강변으로 향했다.
영호는 회령 국경경비초소에서 10년간 근무해서인지 국경경비의근무조직.초소 교대시간.지형.두만강의 깊이등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강변에 도착하자 우리 일가를 30여쯤 떨어진 으슥한 곳에 숨겨 놓고 30~40분간 초소의 경비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곧 우리 일가를 강가 어느쪽으로 안내했다.그 날은 눈.비에 바람까지 불어 무척 추운 날씨였다.두만강둑이 높아 남편은 거의 뒹굴다시피해 내려갔다.바지가 젖으면 나중에 춥다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모두 바지를 벗고 강을 건너라고 지시했다.수심은 매우 얕았다.강을 건널 때는 발이 있는지,딸들이 손자들을잘 업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흥분됐다.
강을 건너자 중국 접경지역에서 안내원이 마중나왔다.곧 옌지(延吉)로 이동해 그날로 선양(瀋陽)에 가 며칠 묵은 후 베이징(北京)으로 갔다.여기서 사진을 찍은 것은 한가해서가 아니라 옌지에서 온 조선족관광객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 다.우리 가족이 실패에 대비해 독약을 소지했다는 보도가 나와 어머니에게 큰 죄를 저지른 것 같다.중국에 있을 때 우리 가족들에게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매우 당황했다.어머니와 가족이함께 있는 자리에서“만약 잡히면 차라 리 여기서 쥐약이라도 먹고 죽지 북한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으나 실제로 구입하지는 않았다.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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