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가는간이역>7.동해 망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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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물새들이 날개를 접고 엎드려/미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있다/지난 세월의/우리들의 모습도 바로 저러했을까.
-신경림 시.겨울바다2'전문 아플 것이다.그곳에 가면 아마 아플 것이다.거센 바람이 불고 찬 비가 이마를 때리는 곳.겨울바다를 찾아나선 길은 멀다.
망상역(望祥驛).서울에서 기차로 8시간.강원도동해시망상동 역무원도 없는 무배치 간이역.사람은 없다.
기차를 기다리는 이도,그를 위해 표를 파는 이도 없다.하루 한두번쯤,어쩌다 타고 내릴 사람이 있으면 지나가던 완행 기차가잠깐 멈춰설 뿐이다.
텅 빈 간이역사.역사 안의 색바랜 회색벽에는 지난 여름의 흔적들이 갖가지 낙서로 남아 있다..잘있어라 3년 후에 보자….
나는 인혜를 사랑해….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그들은 어쩌다 이 작은 역까지 왔을까.짧지만 긴 이야기가 담긴 젊은날의 기록들.그것들을 읽고 있으면 좁은 역사안으로 그 기록의 주인들이 하나 둘 걸어 들어오는 것같다.
망상역을 나서면 여기저기 비로 웅덩이진 좁은 아스팔트 국도.
어두운 겨울 오후,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안개등 불빛이 흩뿌리며 내리는 빗줄기에 부딪친다.
인적없는 그 길을 걸어 20분쯤 가면 마주치는 망상 앞바다.
이 바다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찾아왔다.
바다 앞에 선 사람은 보게될 것이다.잃어버린 많은 것들을.한때는 생(生)과도 바꾸려 했으나 언제부턴가 조금씩 조금씩 잊혀진 것들을.그것들이 회색의 겨울하늘 위로 선명히 떠오를 것이다.기억,삶의 맵고 신 편린들이 흰 물새의 등을 타고 겨울바다 위로 날아오를 것이다.
바람부는 모래밭에 어린 아이를 품에 안은 아버지가 있었다.예쁜 여자아이.
네살쯤 됐을까.아이는 거센 바닷바람을 피해 아버지의 점퍼 속에 숨어 겨울 바다를 보고 있었다.이 오후,바람을 헤치며 젊은아버지는 딸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본 이 겨울의 바다를 언제까지나 기억할것이다.아이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남을 것이다.아버지의 냄새와 따뜻한 체온도 함께 남아 먼 훗날 삶이 너무 힘들 때,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바다는 힘을 준다.비바람 부는 겨울 바다는 그 앞에 선 이들에게 새로운 힘을 준다.겨울 바다 모래밭에서 젊은 아버지와 어린 딸을 보며 생각한다.
아무리 큰 분노도,슬픔도 이 바다의 광대함과 큰 힘에 비하면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어쩌면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성난 바다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나는 자신의 노여움을 억누른다'(에드가 키네.마술사 메를렝'중에서).
망상역.그 앞바다에 가면 가슴에 품은 분노와 슬픔을 파도 속으로 던져버릴 일이다.

<동해=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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