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쓰쿠리(장인정신)’ 앞세워 난국 돌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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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극복의 선봉에 나선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생산현장.

이코노미스트 잃어버린 10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이다. 일본이 1990년대 초의 버블경제 붕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걸린 시간을 뜻한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지만 일본 경제는 예전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정부가 취한 대책은 치명상을 당한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대수술’이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배운다 #도요타가 선봉장 … 100조 엔 쏟아 부었지만 아직도 완치 안 돼

그사이 일본 국민과 기업들이 보여준 자구노력은 몸을 추스르기 위한 ‘재활’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꼭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는다. 등장인물과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교훈이든 반면교사든 배울 점이 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무엇을 했던가?

일본 버블 ‘수술비용’ 100조 엔

과거 일본에서 버블경제 붕괴로 인한 부실채권 규모가 얼마인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대장성이나 은행 같은 곳에서는 10조 엔 전후라고 안이한 추정치를 내놨다. 이때 적어도 80조 엔은 넘는다고 주장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 있다. 미쿠니 아키오(三國陽夫)다. 1963년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후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채권신용평가 회사인 미쿠니사무소를 직접 경영하고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의 추측은 거의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나중에 일본의 부실채권 규모가 100조 엔으로 드러났다. 그런 그가 최근 당시의 계산 방식을 이용해 미국의 부실채권 총액을 추산해 다시 한번 눈길을 끌고 있다. 3조 달러.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수습하는 데 들었던 비용의 3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9월 하순 시점에 세계 금융기관의 손실이 총 1조3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이 금액은 지금까지 수차례 수정된 바 있어 더 늘어날 공산도 크다. 시장 관계자들도 이 정도 금액으로 수습될 상황이 아니라고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미국발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과거 일본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들 것임에 분명하다.

미국 정부도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잃어버린 10년’의 교훈을 활용했다. 과거 일본 정부가 취했던 것과 비슷한 치료법이다. 속도는 10배나 더 빠르다. 일본이 부실채권 처리를 위해 썼던 금융안정화 대책은 크게 3단계였다. 우선 자금을 대량 공급해 단기 금융시장에서 은행 간 자금거래를 원활하게 하는 유동성 공급을 실시했다.

자금난 때문에 은행이 연쇄 도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그 다음에는 부실채권 매입이다. 민간은행이 공동 출자하거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법으로 부실채권 매수기관을 설립해 부실채권을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서 분리했다. 마지막 단계가 부실채권 처리과정에서 자본이 줄어든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조치다.

금융위기가 불거지자 미국이 발 빠르게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과 공조해 유동성 확보를 꾀한 것은 1단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2단계에 해당하는 부실채권 매입기구 설립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부실채권 처리를 위해 세금을 투입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미국 국민의 분위기 탓이 컸다.

7000억 달러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구제금융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것이다. 추후 법안을 손질해 통과되긴 했지만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대선을 앞둔 미국 정치권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1995년 말 주택금융 전문회사의 처리를 위해 세금을 투입하기로 각료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자민·사민·사키가케 연립정권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一)총리였다.

그러나 이듬해 초 무라야마 총리가 갑자기 사임하고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총리가 총대를 멨다. 갈 길 바쁜 미국 역시 당시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정치 공백이 부담이다. 부시 정권 말에 금융위기가 터졌고 새 대통령이 이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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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체들이 흘린 피눈물

미국발 금융위기의 후폭풍을 기다려야 하는 한국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이 벌써부터 보이고 있어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위기를 초래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허둥대다간 더욱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금융위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신중하게 관찰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한 데서 교훈을 찾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조업체들의 피나는 자구노력이다. 금융위기로 극심한 불황에 빠진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모노쓰쿠리(ものつくり)’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갔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품질 좋은 제품을 가장 싼값에 만들어내는 장인정신이다. 자동차업계를 대표하는 도요타가 선봉장을 맡았다.

1990년대 초 버블경제 붕괴로 인한 장기불황과 엔고 여파로 대다수 일본 기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도요타 또한 1993년 경상이익이 25.5%나 감소할 정도로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도요타는 비용절감 프로그램을 가동하면서도 품질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기존 부품 활용률을 높여 설계기간을 단축함으로써 신차 개발 기간을 무려 18개월이나 단축했다.

또 부품을 표준화해 모듈 생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제조과정을 대폭 줄였다. 사업개편과 경쟁사와의 부품 협력 등을 통해 연간 400억 엔의 부품구입비를 절감하는 노력도 함께 했다. ‘마른 수건도 짠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4년 13억 달러를 밑돌던 순이익이 이듬해 다시 27억 달러로 올라갔으며, 지금은 매출은 물론 기술 면에서도 세계 자동차업계를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과거 일본에 비해 더욱 심각하고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도요타와 같은 제조기업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부실채권에 포함된 상품 대부분은 복잡한 증권화 상품이다. 이들은 시가로 평가되기 때문에 처리를 지체할 수 없다. 증권화 상품은 시장에서 값이 매겨지지 않으면 자산가치는 더욱 내려간다. 매수자가 없는 증권화 상품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은 평가손이 급격하게 늘어나 유동성 위기에 빠지고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된다.

김국진 기자 [bitkuni@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 9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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