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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리뷰>2.출판-역사書 열풍의 한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현대사회를 ‘풍요 속의 빈곤’으로 정의했는데 우리 출판계는 올해 ‘빈곤 속의 풍요’를 만끽(?)했다.경기(景氣)는 여전히 위축됐지만 속내용은 단단하게 다져졌다는 뜻에서다.

우선 통계수치가 ‘가난한’출판살림을 웅변으로 보여준다.정초부터 10월까지 출판협회에 납본된 신간은 2만7백19종.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아우성이 나왔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나 줄어들었다.영상세대들에 호소력이 강한 만화를 제외하고 철학·문학·아동물등 전분야에 걸쳐 감소세가 뚜렷했다. 질질 끄는 경기침체에 7월부터 발효된 개정저작권법이 겹치면서 출판사들의 운신폭이 크게 좁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窮卽通)고 했던가.빈한한 만큼 가능성 또한 돋보인 한해였다.가장 두드러지게 약진한 분야는 인문교양서.전문가들조차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90년대 들어 조용히 불기 시작한 바람이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인문학 열풍’은 역사분야에서 시작됐다.상반기를 강타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현재 5권까지 나와있는데 간단하지 않은 내용에도 50여만부가 나가는 대기록을 세웠다.세계를 정복한 로마인의 실리적 지혜가 어려운 현실을 헤쳐나가려는 일반인들의 요망과 맞아 떨어졌다.

중앙일보가 연말을 맞아 각 출판사 편집·기획책임자 30명에게 추천받은 ‘올해의 우수도서’(표 참조)에서도 역사물의 강세는 그대로 드러났다.국내서로는‘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약진이 눈에 띈다.왕조 중심의 딱딱한 서술방식과 관계없이 28만여부나 팔렸다.‘역사신문’‘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우리 역사의 여러 모습’등도 당당하게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

민음사 이갑수 국장은 “1천년을 마감하는 대전환기를 맞아 과거를 정리하려는 기획방향과 난세 극복의 처방을 찾으려는 독자의 욕구가 일치한 결과”라며 “인문학 열기는 내년에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고고학·인류학의 신장도 비슷하게 설명된다.인류문명의 시원을 조명한 ‘신의 지문’과 생활주변 관습의 문화적 유래를 서술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는 각각 14만부와 8만부가 나갔다.‘고고학 이야기’‘최초의 인간 루시’‘고대 인간의 지적 모험’등 사랑받은 고고학 책만 10여종.미국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주도한 문화인류학도 1년 내내 인기를 끌었고 ‘털없는 원숭이’‘제3의 침팬지’‘개미 세계여행’등 동물들의 습성을 통해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한 동물행동학도 큰 줄기를 이뤄갔다.

푸른숲 김학원 주간은 “지식대중화의 원년에 해당될 정도로 출판분위기가 긍정적 방향으로 돌아섰다”며 “최근들어 전문지식을 쉽게 풀려는 소장학자들의 열의가 높아 내년엔 교수 신분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다수 떠오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원전에 대한 높은 관심과 줄이은 전집류 출간,그리고 오역(誤譯)에 대한 반성도 출판계의 저력을 다졌다.사마천의 ‘사기’, 헤겔의 ‘미학’,인도경전 ‘우파니사드’등 대작들이 완역됐는가 하면 프로이트·괴테·울프·김정희·조지훈등 국내외 작가의 전집발간이 활기를 띠었다.니체·톨스토이등 전집열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또한 한울·영진·삼성출판사 등에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출판의 정보화작업도 첫발을 내디뎠다.

반면 내년에 풀 과제도 많다.가장 시급한 문제는 낙후된 유통구조의 개선.올들어 한국출판유통·한국출판정보통신의 발족,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의 가시화등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할 일 또한 산적하다. 이밖에 ▶열악한 환경의 학술출판 진흥책▶필력 있는 국내저자 발굴▶분야별로 더욱 세분화된 기획력▶영상매체에 빼앗긴 독자층 확보▶세련되고 깔끔한 편집력등이 숙제로 꼽힌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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