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법주사 복천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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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진정(眞靜)스님이 시창했다는복천암(福泉庵)은 왕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 중의 하나다.왕이라해서 어찌 괴로움이 없을 것인가.그들도 역시 번민하는 한 중생인 것이다.
고려시대 공민왕도 나그네가 걷고 있는 이 산길을 지나 복천암에 다다랐으리라.
조선시대 세종은 정사(政事)를 돌보느라 너무 바빴던지 암자의신미(信眉)대사를 한양의 궁으로 불러들여 법문을 듣고 한글 창제 작업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체계를 스님에게 자문토록 했다고 전해진다.복천 암 사적비에 따르면 스님의 그런 공로가 있어 한글이 반포된 후 세종은 복천암에 미타삼존상(彌陀三尊像)을 조성.봉안케 했으며 문종은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익호를 내렸던 것이고.
암자에 들어서자마자 나그네는 복천선원(福泉禪院) 옆에 있는 석간수에 목을 축인다.수각은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인 이경령보살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시주금을 받아 시주한 것이라고 한다.
암자에 있는 5개의 석등과 수각에 각각 이경령(李 慶齡)이라고음각된 것을 보니 사실인 것같다.
한 스님의 안내로 암자에서 2백쯤 떨어져 있는 신미대사와 학조(學祖)대사의 부도를 참배하고 난 후 다시 돌아와 녹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제야 암자의 선원장(禪院長)인 월성(月性)스님이미소로 반긴다.
“한글 창제의 공이 이제까지는 집현전 학자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역사책에 쓰여 있는데 신미대사의 공도 인정해야 합니다.또 정이품송은 세조가 복천암에 계시던 스님을 만나러 오다 생긴 일화지요.세조는 젊은 시절부터 집현전을 드나드는 스님 을 신경(信敬)했지요.그래 심신이 괴롭고 지치자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스님을 찾았던 것이지요.” 월성스님의 얘기인즉 세조는 복천암에와 심병(心病)을 씻고 신미대사의 청에 의해 다시 오대산 상원사에 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고 난 뒤 피고름이 나는 몸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니 마음이 급해진다.더 듣고 싶지만 법주사 주지인혜광(慧光)스님을 만나뵙고 하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마침 기다리고 계시는 스님을 뵈니 왠지 염주 하나를 선물받은 것처럼 행운이 느껴진다.
“나는 참배객에게 팔상전의 표정이 서로 다른 오백부처님을 보고 당신은 어떤 부처님하고 닮았는지를 찾아보라고 하지요.하하하.” 어느새 날은 스님의 너털웃음과 북고와 이어 범종,그리고 목어와 운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어두워지고 있다.낮엔 등산객들로떠들썩했는데 비로소 세속을 여읜 적막강산의 속리(俗離)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문장대 가는 길에 있는데 매표소에서 1시간 정도 걸으면 암자에 이른다(0433-43-4774).
글: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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