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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흙에서 인간적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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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임영태·이서인 부부가 밭일을 하던 중 막걸리를 마시다가 이웃사람을 큰소리로 부르며 술을 권하고 있다.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하루 내내 밭에서 올해 첫 씨뿌리기를 했다. 감자·알타리·봄배추·상추·쑥갓·당근·근대 등이다. 씨를 뿌리고 열흘쯤 지나면 크레파스로 점 두어 개 찍어 놓은 것 같은 푸른 싹이 소리 없이 올라와 있다. 이게 그 씨앗인가? 이게 장차 그 열매가 되는가. 정말 신비하다.”

충북 제천 박달재 기슭인 모정리에 텃밭을 일구고 사는 소설가 부부. 1994년 장편소설 『사람이 아니었어』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임영태씨와 1998년 잡지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한 이서인씨가 그들이다.

이들 부부가 40대 중반 도시를 떠나 풀과 나무와 동물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농사를 지은 지는 벌써 3년 남짓. 처음 이곳에 이방인처럼 들어와 살 때는 이웃들조차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농사꾼답지않은 하얀 피부를 가진 이서인씨와 소설가적 ‘품위’를 유지하고 항상 근엄했던 임영태씨가 적응하기에는 농촌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벗도 생겨 전혀 심심하지 않다고 한다. 저녁에는 슬렁 슬렁 동네로 가서 “형님 소주 한잔 합시다” 라고 허접을 떨기도 하고, 저녁에는 텃밭에 앉아 밭을 바라보며 사람살이의 애틋함과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이들 부부에게 농사일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익숙하지 않은 몸짓, 밭을 갈고 물 뿌리는 것조차 서투른 한때였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줄곧 생각한 것은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해’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얻는 삶의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는 이전투구만 가득한 도시에서 그들은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다. 땅은 정직하다는 말 따위는 차라리 진부하다고 생각되었다. 다만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다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씨앗 하나를 뿌리는 것조차 글쓰기와 다름없이 어려웠다.

소설 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농사라는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농촌은 결코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다. 돼지 한 마리를 잡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을 해서 잡는다.

‘해머가 돼지의 정수리에 박히는 소리, 가슴을 후비며 생생하게 찢어지는 길고 긴 비명 소리, 콸콸 쏟아지는 피, 목이 잘려 구렁이 서너 마리 엉킨 듯한 거대한 창자. 나는 이 끔찍한 살육 현장에 동참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우고 있는 개 태인이와 모정이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장에 새끼를 팔러 갔다. 아내는 하루 종일 장에 앉아 새끼 한 마리를 팔았다. 나는 한 마리도 팔지 못했지만 농투성이로 변해가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임씨 부부는 농촌 생활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매일 매일 일기로 쓴다. 제목은 ‘모정리 일기’라고 붙였다. 가을에 출간될 예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40년이 넘도록 가게에서 사먹던 것을 이제는 직접 가꾸는 농사꾼이 되었지만 수확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텃밭에 참외·수박·오이·땅콩 등 스무 가지를 심었지만 참외와 수박은 모두 짓물러버려 구경도 못했다.

처음에는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는 여유를 가지려고 했지만 그것은 허튼 낭만에 불과했다. 그냥 씨만 뿌리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 농사라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수확한 뒤에도 할 일은 태산이어서 고추 하나를 수확해 방앗간에 가서 빻는 일도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고추 하나 하나 잎사귀를 따고 마른 걸레로 일일이 닦은 다음 한 포대를 방앗간에 가지고 가면 겨우 수확하는 고춧가루는 커피병 삼분의 이 분량에 지나지 않았던 것. 아연 허무감이 깃든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하루는 언제나 즐겁다.

어차피 농사란 본업이 아니었다. 제가 뿌린 것을 거두어 먹는다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글을 쓰기 위해 이곳에 왔기에 생활비는 글쓰기를 통해 얻는 수입이면 그만이다. 물가가 싸서 더 이상 들어갈 돈도 없으니까 말이다.

이들 부부의 텃밭은 삼백 평이다. 농사로는 턱없이 적은 땅이지만 텃밭으로는 꽤 되는 면적이다. 시골 생활은 부지런하지 않으면 결코 살 수가 없다. 이곳에 와서 낮에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농사란 중노동이기 때문이다. 낮에 일을 하면 밤에는 10시만 되어도 졸음이 저승처럼 밀어닥친다.

이들처럼 운명적인 글쓰기를 위해 각박한 도시적 삶을 버리고 떠난 작가들은 많다. 시인으로는 이원규, 박남준, 유성도, 정일근, 이진우, 강제윤 씨가 있으며 소설가로는 윤대녕, 정찬주씨가 있다. 이들 중에서 최근 농촌 생활에서 얻은 지혜 등을 책으로 엮은 이가 적지 않다.

최근 산문집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좋은 생각)를 펴낸 시인 이원규씨와 전남 화순 산골에 흙집을 짓고 나무와 풀과 동물을 키우며 농촌 생활의 즐거움을 쓴 『소박한 삶』(김영사)을 펴낸 소설가 정찬주씨가 대표적인 작가다.

“지리산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철’을 잘 놀았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던가. 7년 만에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시인 이원규씨는 낙동강 1300리와 전라도 850리를 걷고 백두대간과 새만금도 돌아보고 그마저 지겨우면 오토바이를 타고 꽃피는 속도, 단풍 드는 속도로 여행을 했다고 한다. 시의 절창을 위해 서울을 청산한 시인이다.

창호지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흙 냄새에 깨어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설가 정찬주 역시 마찬가지다.

“처소를 찾아온 손님들은 대부분 나에게 왜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들어왔노라고 말해준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깨어 있다는 말이다.” 그 역시 참으로 고요하고 깨끗한 것,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며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이 없는 것, 그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해 시골로 갔던 것이다.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게다가 그들이 머무는 곳도 음습하고 혹은 어두움의 연속이다.

왜 그들은 끊임없이 일상적 삶을 거부하고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작가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삶의 향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마음의 고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어디론가 자신을 버리고 내던졌다가 다시 몸 안으로 품으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적 삶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에겐 한없이 정상적이고 편안한 일상의 세계가 그들에겐 줄곧 올바르지 못한 삶의 뒤틀림으로 보여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도피적 삶을 위해서일까. 그러나 적어도 도피적 삶은 아니다. 보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보다 더 정신적인 삶의 공유를 위해서임이 분명하다.

토방에 앉아 한잔의 토주를 마시고 손수 뿌린 ‘씨앗의 열매를 먹으며 삶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뚜렷한 삶의 자각을 느끼고, 깨닫고 고통당하는 작가의 심연 속에는 바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회적 흐름에 대한 심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굳이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는 박경리 선생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마 그들이 도시적 삶을 버리고 시골로 간 것은 ‘고통스러운 작가’보다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리라.

정성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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