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세상 썩는줄 모르는 비리 불감증-클리닉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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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비밀장부에 매월 7백만~8백만원 을 준비했다가 경찰과 구청직원에게 줬다.”“상납 대가로 1년동안 심야영업단속과 미성년자출입단속을 한차례도 받지 않았다.”“업소증축허가도 뇌물로 받았다.”지난달 25일 서울지법에서 있었던 증언내용이 다.피고는 경찰과 구청직원,증인은 나이트클럽 사장.
영화.투캅스'가 떠오른다.경찰로 분한 안성기와 박중훈이 술집주인에게서 상납받는 장면이 여러차례 나온다.우리는 이런 영화를보고“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가”라며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다.으레 있는 일로 재미있게 묘사한 감독과 배우 에게 칭찬을 보낸다.이런 정도는 이미 익숙해진 탓이다.
.투캅스'를 보면서 웃어넘긴 우리는 모두 이미.비리 불감증'환자가 돼있다.아니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이 정도는 서슴지 않을 준비가 돼있는.비리 상시(常時)대기자'다.하긴 장관부인이 억대의 뇌물을 받고 구속돼 있는데도“몰랐다”는 한마디로 남편은 무사한 것이 현실이니 말단들이 고작 몇십만원 주고 받았다고 그리 분개할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불감증 속에 세상이 썩어간다.나이트클럽 사장이 갖다바친 돈봉투 하나에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모두 들어 있다..비밀장부'에 관리한 비자금,이건 명백한 탈세의 증거다.미성년자출입단속이 없었다,이건 교육문제와 청 소년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최근 5년간 전체 범죄증가율이 13%지만 소년범죄 증가율은 45%나 된다.불법증축허가,이건 심심하면 터져나오는 유흥업소의안전문제,떼죽음사고의 원인이다.
.걸린 사람만 재수없는 놈'이 돼버리는 단속,이것이 국가공권력을 무서워는 하지만 결코 존중하지 않는 왜곡된 국민정서를 낳는다.법과 질서 이전에 믿음과 신뢰가 오가는 공동체는 무너졌다.우리 모두가 공범자다.액수가 많아야 뇌물이고 고위 공직자가 걸려야 비리가 아니다.주변에 흔하게 널린 돈봉투문화에 너무 관대한 우리 모두가 결국은 큰 사건.구조적 문제를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한 코미디프로에서 공직자 비리를 줄여.공비'라고 불렀다.정말 언제쯤이면 몇십만원짜리 공직비리 하나하나에 동해안에 출몰한 무장공비 보듯 호들갑 떨며 놀랄 수 있을까.
정관용〈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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