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나다>美에 한국연극 심은 이동일 하버드大 연구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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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이동일(35)씨.얼핏보면 좀 따분한 경력의 소유자다.단국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아 공식타이틀이.이박사'인 것이 우선 그렇다.이후 94년부터 2년간 미국의 여류명문 스미스대 연극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이교수'였던 것도 마찬가지다.현재 공식직함 역시 거창해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대학시절 연극에 빠져 전공공부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것도별로 내세울게 못된다.“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해 진작 배우생활을포기했다”는 고백 역시 미지근하다.그렇다면 졸업후 전성기 연우무대에서 조명을 맡았던 것? 그 유명한.한씨 연대기'.칠수와 만수'조명색이 바로 그의.컬러'다.누가 알아주기라도 했나.하나챙긴 것은 연우무대 소속 배우였던 노주원씨를 지금의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 뿐이다.그에게서 삶의 우여곡절이 엿보이지 않을만도하다.연극평론가면서 단국대 연 극학과 교수인 이태주씨가 부친,연극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극 매니어 진영숙씨가 모친이다.이교수는 70년대를 풍미했던 연극전문잡지.드라마'를 손수 꾸리다 결국 다 날려먹었던 기록의 소유자다.
결국 이동일씨는 86년12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충돌과 갈등의 한복판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과연 미국은….” 18세기산업혁명 당시.도시의 공기가 사람을 자유롭게'했듯 그 역시.자유로운 충돌'과 맞닥뜨렸으니까.
박사과정중이었던 92년 그는 미국내에서도 쟁쟁한 극작가 리크시오미,연출가 마샤 존슨과 손잡고.극단 무(巫.MU)'를 창단했다..오백년된 세개의 원들:미국 재발견'.탈춤,내면여행'등 작품은 언론과 전문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최근 작.아시안의 함성'역시 그랬다.그의 미국내 연출작품은 모두 11건.연이어진강연.워크숍은 그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그리고 자신은 우리 전통예술이 미국 중심에 자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의 논리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충돌을 기피하는 문화는 소멸한다.그리고 과거라는 정체된 시간성.공간성은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속에서 창조적으로 계승되는 것이다.이때 해체는 문화의 원형을 당대 성향에 맞게 변화시켜 재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스미스대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옮겨놓으면 사정이 달라진다.소수민족 교수 15명을 대상으로 한 교원노조 결성이 바로 그것..충돌.해체'개념을 무대가 아닌 현장에서 실천한 또 하나의 작품이었던 셈이다.그래서 그는“다문화지역인 미 국에서 충돌실험은 가장 용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활동의 축을 한국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거대한 주류의 틈새에서 그냥 의미있는 소수민족 예술로 취급받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으로 보면 된다.“내 얘기로 끌고가지 못하는 작품의 생명력엔 한계가 있다.”그가 이번 3주간의 한국방문기간중 공연영상대학(원) 설립 가능성을 집중 타진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주목하는.현대와 전통이 휘몰아 돌아가는 역동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그리고 인류보편의 아픔으로 남아있는 분단문제.그가 현대공연예술의 대가 중국계 미국인 핑총과 한판 굿을 벌이기로 작정한 것도 이 연장선상이 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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