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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세상을 읽다] 도시락 먹고, 스타벅스 덜 가고, 경조사는 가려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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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가을 바람과 함께 미국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출렁대는 주가와 환율 속에 경기 침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요즘,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중앙SUNDAY가 서울역에 나가 시민 109명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Q. 금융 위기 이후 소비를 줄였나.
-예 85명 -아니오 24명
Q. 실직이나 폐업의 불안이 있나.
-예 56명 -아니오 52명 -실직 중 1명

서울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었다. 물가상승으로 인해 실질소득이 하락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일단 씀씀이를 줄이자는 심리였다.
“최근 6개월 사이에 물가가 너무 올랐다. 느끼기에 20%는 오른 것 같아 장보기가 너무 힘들다.”(40대 주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 경기 침체와 환율 급등 때문에 사업계획 세우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50대 사업가)

실제로 일터를 잃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절반 정도는 실직이나 폐업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제위기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생활과 노후생활이 위협받을까 봐 걱정하며 지출을 줄이고 있었다. 소득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일단 아끼고 본다는 반응도 많았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려는 서민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사람들은 의·식·주 기본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을 가장 먼저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식 횟수를 줄였다.”
“고기를 덜 사먹게 됐다.”
“알짜식당을 검색해서 찾아다닌다.”
“김밥이나 라면,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게 된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다.”
“간식을 줄였다.”

음식비를 줄였다는 대답 다음으로 “좀 더 싼 주택으로 옮기겠다” “예전에는 백화점 브랜드 옷을 고집했는데, 요즘에는 저렴한 길거리표 옷을 많이 산다” 등 주거와 의류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는 답이 이어졌다. “예전에는 계절에 한 번씩 옷을 샀는데 마지막으로 언제 옷을 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자녀들에게 옷을 물려 입게 한다”는 대답도 있었다. 할인매장 가는 횟수를 줄이고, 가더라도 꼭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을 미리 작성하는 등의 방법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다 줄였다. 1만원이 아깝다”는 절박한 반응도 있었다.

에너지 절약은 이미 습관화돼 있었다. “가스 불 줄이고 전기 코드를 항상 뽑고 다닌다” “욕조에 물을 채워서 목욕하는 대신 간단하게 샤워를 한다”는 식이다. 자가용 운행을 줄였다는 대답도 많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카풀을 한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차를 팔았다.”
“버스 환승에 집착하게 된다.”

주부를 중심으로 자녀 사교육비를 줄였다는 답이 많았다. “아이 과외를 5개에서 2개로 줄였다”에서 “학습지를 사서 아이를 직접 가르친다”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자녀 용돈을 줄였다”는 반응도 있었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을 줄이는 마당에 문화·레저 비용이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여행을 줄였다” “책 사기가 부담스러워 구립이나 시립 도서관에서 주로 빌린다” “영화나 연극을 덜 보고 데이트 횟수를 줄였다” 등이었다. “술값, 담뱃값을 줄였다” “스타벅스 가는 횟수를 줄였다”는 응답도 있었다.

“얼마 전 아이 돌잔치를 했는데 두 달 동안 고추장에 멸치만 찍어 먹었다.” 한 30대 여성은 금값이 올라 돌반지 가격이 비싸지고 사람들의 축하금도 줄어들어 돌잔치가 무척 힘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요즘은 돌잔치를 안 하거나 하더라도 간소하게 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대다수는 만만찮은 부담이던 경조사 비용을 크게 줄였다고 답했다.

“경조사를 가려서 가게 된다.”
“부조비를 10만원에서 5만원으로 줄였다.”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렀다.”
“환율이 너무 올라 신혼여행을 미뤘다.”

한 교회 신앙자는 “교회 헌금을 줄였다”는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다.
금융위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주로 금융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원래 어려운 생활을 해와 새삼스럽게 더 힘들 것도 없다는 부류로 크게 나뉘었다.
“젊은 사람이나 펑펑 쓰지 나는 원래 꼭 쓸 것만 쓴다. 언론에서 불안감만 조성하는 것 같은데 난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응답자도 있었다.
 

Q. 돈은 보통 어디에 넣어두나.
-예금 77명 -주식·펀드 14명
-부동산 5명 -현금 9명
-기타 4명
Q. 최근 예금·보험·펀드를 해지하거나 바꾼 적 있나.
-예 33명 -아니오 76명
Q. 빚이 있나.
-예 46명 -아니오 63명
Q. 금융위기 후 빚이 살림에 주는 부담이 커졌나.
(빚이 있는 응답자에 한해 질문)
-예 31명 -아니오 15명
Q. 어떤 빚이 가장 많나.
-주택담보대출 24명
-신용카드 7명
-신용대출 6명
-마이너스통장 5명
-기타 4명

최근 주가 폭락을 전후해 예금·보험·펀드 계좌를 해지하거나 바꾼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보험이나 펀드 계좌 자체를 소유하지 않거나, 환매 시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자금이 묶인 사람이 많았다. 현금을 주로 보유한다고 답한 사람은 대부분 여유 자금이 없는 서민층이었다. 빚은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많았지만 소득감소와 대출금리 상승에 대한 불안감은 마찬가지였다.

경제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자금관리방식 자체를 바꾼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적금에 붓는 액수를 늘렸다는 반응이었다. 한 30대 남성은 “올해 3월부터 주식에 투자했던 돈을 모두 빼서 적금으로 돌렸다. 이제는 수익성이 없어도 된다는 마음이다. 무조건 안정성”이라고 했다. 

사진 찍으며 웃어달라 하자 “경제가 좋아져야 진짜 웃지 …”대합실에서 만난 사람들

열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작정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서울역에 가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지난달 24일 오전에 시작된 인터뷰는 생각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설문과 함께 사진촬영까지 요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치는 사람, 획 돌아앉는 사람, 외면하며 가던 길을 가는 사람…. 취재진은 인터뷰 초반에 크게 고전했다. 2시간 동안 계속 퇴짜만 맞자 관상이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진도가 나가기 시작한 것은 의자 위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이들을 한 명씩 천천히 설득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꾼 후부터다. 이틀 동안 취재진은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났다. 젊은층과 남성의 응답률은 괜찮았다. 반면 30~40대 여성의 응답은 최악이었다. 설문에는 응했으나 사진 촬영을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첫날의 성적이 나빠서 둘째 날에는 여성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인터뷰 성공률은 대략 예닐곱에 한 명꼴이었다. 야구의 타율로 치면 2할에 못 미친 셈이다. ‘세수를 안 해서’ ‘경제를 잘 몰라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등 거절의 이유는 많았지만 대부분 낯선 사람과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어 보였다. 마치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경제사정이 나아지길 하소연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기자에게 거꾸로 설문지를 내미는 사람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선 고등학생이었다.

“우린 원래 힘들었어요.”

역사 안에서 만난 퀵서비스 배달원은 평소에도 늘 생활비를 걱정하며 사는 터라 경제위기가 와도 특별히 더 불안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한 60대 여성은 기자가 사진 촬영 도중 웃어달라고 부탁하자 “경제가 좋아져야 진짜 웃을 텐데…”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종찬 기자 j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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