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9000억 달러로 쌓은 新만리장성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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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35면

1조9000억 달러. 세계 4위 경제대국인 중국의 외환보유액이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규모의 두 배에 맞먹는다. 1970∼80년대 막대한 무역흑자 행진을 하던 일본·독일도 깨지 못한 사상 초유의 금액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중국이 가진 ‘차이나 달러’의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위대한 러시아’를 외치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28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자존심을 접고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중·러 교역에서 달러화 대신 루블·위안화를 쓰자고 제안한 것이다. 푸틴은 그 대가로 중국이 필요로 하는 원유 공급을 약속했다. 카자흐스탄 같은 산유국들도 중국에 추파를 던진다. 환란의 공포에 휩싸인 개도국들은 베이징의 구심력을 실감하고 있다.

격세지감이다. 10여 년 전 베이징 거리엔 외국인을 상대하는 암달러상이 많았다. 은행에서 달러당 8.28위안이던 환율을 8.3위안으로 계산해줬다. 중국 정부가 달러화 유출을 강력히 단속하던 시절이었다. 96년 외환보유액은 1050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위안화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5∼6년 전 불황을 겪던 홍콩의 점포들은 ‘위안화 세일’을 했다. 중국 관광객의 지갑을 노려 위안화와 홍콩달러화를 같은 환율로 계산해 줬다. 환율 차이만큼 가격을 10%쯤 깎아줄 테니 위안화를 빨리 처분하고 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재테크 수단으로 인기 만점이다. 최근 3년간 위안화 가치는 20%쯤 올랐다. 들고만 있어도 세금 없이 연 6%의 수익률을 안겨줬다.

중국은 덩샤오핑 시대에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을 고수했다. 말 그대로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실력을 키웠다. 이 전략을 반영하듯 중국 지도부는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단일패권을 쥔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행여 금융위기 불길이 중국·홍콩으로 번질까 노심초사했다. 위안화 절상과 자본·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꿋꿋이 버텨온 것도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다.

중국은 그러면서 ‘외환 곳간’을 조용히 채워나갔다. 금융위기 폭풍우 속에서 1조90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만리장성 역할을 하고 있다. 외환·금융시장에 겹겹이 빗장까지 쳐놓아 국제 투기세력은 중국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맞이한 중국의 자세는 180도 달라졌다. 돈이 힘을 줬다. ‘미국 책임론’을 제기하고 국제 금융체계 개편을 주장한다. 후진타오 시대의 ‘유소작위(有所作爲)’ 전략이다.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적극적인 관여와 개입을 하겠다는 자세를 숨기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15일 워싱턴 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개도국 입장을 대변하겠다고 벼른다.

이번 금융위기의 최종 승자는 누가 될까. 현재로선 중국이 유리한 고지에 섰다. 중국이 가진 미 국채(5400억 달러)를 시장에 풀어놓으면 전 세계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제는 미·중 간의 견제와 협력이 공존해야 할 시대가 됐다. 달러를 펑펑 찍어내 흥청망청 썼던 미국으로선 자업자득의 덫에 빠졌다.

어디 미국뿐이랴. 11년 전 국가부도 위기를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린 한국 신세 역시 딱하다. 국가경쟁력은 뒷걸음질치고, 관광·교육·서비스 같은 성장 동력을 잡지 못해 해외로 새나가는 달러화는 얼마나 많은가. 100위안짜리 지폐 속 마오쩌둥 초상화가 껄껄 웃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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