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모두가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6호 15면

바닷가에 배가 난파되거나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사막이나 추운 산에 홀로 남겨졌을 때,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저체온증이나 탈수 같은 신체증상 때문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지만, 추레한 살쾡이를 잘못 보고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투자를 잘못해 공포와 절망으로 자살한다는 흉흉한 뉴스들이 어느덧 익숙해진 듯 세상이 고단해졌다. 어렵게 모은 돈을 주식이나 펀드·부동산으로 날리고,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장애가 생기거나, 남에게 투자를 유도했다 실패한 죄책감으로 우울증이 와서 자살충동을 느끼는 환자들의 상담도 확실히 늘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에는 쇼핑이나 약물중독, 외도나 도박으로 인한 가정파탄, 앞뒤 가리지 않는 사교육과 조기 유학으로 엇나가는 아이들이 큰 이슈였던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공황발작으로 심혈관계 이상을 의심하고 내과나 신경과를 찾거나, 정신증상은 부정하고 갈등을 다양한 신체 증상으로 표현하는 가면우울증(Masked depression)을 앓는 환자도 자주 만난다.

모든 짐승은 위험이 닥치면 재빨리 도망칠 수 있게 심박동과 호흡 횟수가 빨라지며 말초혈관으로 가는 혈액량은 줄고 머리와 심장으로 피가 몰린다. 전형적인 공황장애의 형성기전이다. 또한 생명에 위협이 오는데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잘 여유가 없으니 소화기관이나 신경 호르몬 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정신신체질환 (Psycho-somatic disorder), 즉 스트레스와 감정적 원인으로 인한 신체증상과 불면 등 다양한 심리적 증상도 찾아온다. 현재의 경제 위기는 어찌 보면 맹수를 만난 이상의 충격과 공포라 할 수 있다. 불안과 우울감 등의 증상이 오지 않는다면, 원시적 수준의 방어 기전인 부정(Denial) 상태에 빠져 절박한 위험을 외면하는 건 아닌지 오히려 의심할 만하다.

다만 경험에 입각해 미래를 계획할 줄 모르는 동물과는 달리 ‘시간’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는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안다는 점이 다행이다. 홍수로 세상이 떠내려 갈 것 같아도 언젠가는 날이 개고, 가뭄 끝에는 단비가 내린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흥청망청할 때는 고지식하고 답답한 회의적 시각이, 불황기에는 현실에 근거한 긍정적 태도가 꼭 필요하다.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대극의 합일과 불교나 유교에서 강조하는 중용의 도(道)와도 통하는 덕목이다.

지금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불안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어려운 시절을 잘 참아내면 오히려 더 깊은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수천년의 전란과 기아에도 생존에 성공한 기억들이 우리 유전자에는 깊이 내장되어 있다. 모두 겪는 난리는 난리가 아니라며 수상하고 어려운 시절을 잘 견딘 우리 조상의 여유와 끈기가 아쉽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