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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김치 먹게 해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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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당시 한 전투진지.


이코노미스트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박정희, 존슨 대통령에 친서 … 조중건은 월남 출발 하루 전 부인에 얘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⑨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여보, 나 내일 월남 가”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大路)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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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조중건 당시 대한항공 사장이 기내에서 직접 서비스를 하고 있다. 조 고문은 화끈한 성격으로 뜨거운 것은 아주 뜨겁게, 차가운 것은 아주 차갑게 서비스하라고 말하곤 했다.

-그걸로 작별 인사는 끝입니까?
“끝이긴, 이혼 당하는 줄 알았지. 하하하.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달래지만 그게 됩니까? 전쟁터로 간다는데. 기가 막히고 구정이고 뭐고 없어요. 미쳤다는 거지. 붙잡고 말리고 난리예요. 근데 우리 집안은 위계질서가 대단합니다. 형님이 금광에서 돈 냄새가 난다고 어느 정도 나는지 조사를 해보라고 해서 가는 거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울다가도 아무 소리 못해, 하하하.”

실제로 한진그룹 창업주의 가족사는 재계에서도 어두운 소리 나오지 않고 화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조 상무는 모든 것이 ‘형수’에게서 나온다는 얘기를 했다. 객담일 수 있겠지만 경제인들과는 대체로 업무적인 얘기만 하다가 가족사를 듣게 되는 것은 퍽 흥미있는 일이기도 해서 일부를 소개한다.

“우리 집안이 말이죠, 우선 형수님부터 보면 서울토박이고 내가 알기에는 우리 형수님의 아버님이 경리 출신입니다. 옛날의 서울토박이라면 샌님이라고도 하지만 양반 기질이라는 게 꽉 자리 잡고 있잖아요. 거기다가 원칙적이고 깐깐한 그런 부친 밑에서 아주 철저하게 가정교육을 받은 형수님이라 시집와서도 집안에서 풍파를 일으키거나 어떤 문제로 시끄러운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했어요. 형제들끼리 싸운다? 아예 그런 일은 싹부터 잘라서 없게끔 만들고, 내 기억에도 그런 문제는 일으키지도 않았고 전혀 없었어요. 서로 얘기할 게 있으면 다 하도록 하고, 이해를 해서 풀도록 하고. 그래서 집안의 질서를 지키려고 정말 노력하고 애들 교육도 그런 쪽으로 아주 철저하게 시키고. 그게 안 됐으면 우리 형님이 기업을 일으키고 밖에서 그렇게 일을 하기가 어려웠겠죠. 집안이 시끄럽거나 우환이 있거나 하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경이 쓰이는데 무슨 일을 해요. 특히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가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절대 될 수가 없지요. 더구나 형님은 만날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서 일을 만드는 분인데. 그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형수님을 보면 참 많이도 참고 희생하고 있다는 걸 여러 번 느끼게 되지요.”

재계선 두 형제 우애 부러워해

사실 조중훈 회장의 근엄하면서도 정적인 언행과 조중건 고문의 동적이고 사교적인 모습에서 재계 사람들은 형제만 봐도 부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에피소드지만 두 형제를 비교하는 일화도 있었다. 형이나 동생이나 고객이든 회사의 중역이든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동의를 할 때 ‘예스(yes)’를 쓰지 않고 ‘슈어(Sure)’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한때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의 ‘슈어’가 유행어처럼 한진그룹에 번지기도 했다. 외형적으로도 두 형제는 다른 면이 많지만, 조 고문은 가령 비행기를 탔을 때 승무원들에게 뜨거운 것은 아주 뜨겁게, 차가운 것은 아주 차갑게 하도록 주문하기로 유명했다. 식사는 물론 승객에게 손을 닦으라고 주는 물수건도 받는 순간 집어 던질 정도로 뜨겁게 해야 좋다는 것이고 커피도 혀가 델 정도로 해야 ‘잘했어’ 그랬다.

당연히 여름엔 손이 얼 정도로 차갑게 하라고 했다. 반면 조 회장은 정적인 것을 강조했다. 가령 승객이 잠들어 있으면 깨워야 할 경우 의자를 흔들거나 말로 깨우지 말고 손을 꼭 잡아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승무원이 승객의 손을 꼭 쥐어주면 놀라서 깨어난 승객도 기분이 좋을 것 아니냐면서, 늘 손에 향기 좋은 크림을 바르라고 한 것도 그래서라는 것이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 회장은 예민하면서도 무척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조양호 회장은 위트 있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승무원이 되라고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수더분한 여승무원하고 있었던 일화다. 어떤 나라의 전통음식이 나왔을 때 조 회장은 ‘이걸 만드는 나라에서는 침을 발라가면서 만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여승무원은 거침없이 ‘그러면 제가 침을 발라서 만들어 드릴까요?’했다는 것이다. 조양호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막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왔다.

-이제 월남 시장을 개척해야 될 상황이 왔잖습니까. 다소 심적인 중압감이 있었고 더구나 한진이 첫 해외 진출인데, 어떤 준비를 하신 겁니까.
“솔직히 준비는 타이프라이터 한 대밖에 없었고, 어떻게 되든 일단 월남 땅을 밟고 보자, 문제가 있으면 거기 가서 해결하자, 그런 각오였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도 사업이라는 게 운이 참 중요하다, 운이 따라야 하겠습디다. 아이디어도 있어야지만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돼요. 무슨 얘기냐 하면, 그날이 구정이고 마음은 무겁고 한데 오후에 전화가 와요. 노스웨스트 항공사 지점장인데 마이클 장군이 서울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겁니다. 마이클은 그 시점에서 2년 전에 대령 달고 8군 수송감을 하다가 미국에 가면서 장군이 됐어요. 그 당시 직책이 뭐냐, 미 육군의 전체 수송감이야. 대단하죠. 그 사람이 나를 찾는다는데 귀가 번쩍할 거 아닙니까? 당장 전화를 했지요. 나하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너 언제 왔느냐, 지금 거기로 갈 테니 기다려. 그런데 구정이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술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내일 월남에 간다고 하니까 왜 가느냐고, 돈 냄새 맡으러 간다, 누굴 만날 거냐, 제너럴 하인카스 부사령관이 내 친구 아니냐고, 그 친구한테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대뜸 헛다리짚지 말라고 그러네? 일순간에 멍해지는 거지요.” <계속>

이호 객원기자·작가·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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