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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화제작기행>"정보화의 불나방" 그레고리 롤린스 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춘추오패의 하나로 꼽힌 영걸이었지만 신흥야만국 초(楚)나라와의 전쟁에서 예의를 너무 차리다 패퇴해 후세사람들에게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웃음을 샀다.아스테카제국의 인디언 전사들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군을 앞두고 전쟁의 예식을 치르는 중에 유린당해 버렸다.
전쟁도 문명의 한 측면임을 생각하면 관습과 명예에 얽매여 패전을 감수한 옛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화기(火器)의 발달은 근대전쟁을 상대방의 얼굴도 보지 않고 살상하는 「얼굴없는 전쟁」으로 만들었다.이제 얼굴은 커 녕 파괴할 도시도 보지 않은 채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컴퓨터화면만 보며 단추를 누르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88년 7월,걸프해에 파견돼 있던 미국 순양함 빈센트호는 이란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해 2백90명을 죽였다.그날 빈센트호는 이란 전투기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경보를 받고 있었다.최첨단 전자장치를 갖춘 빈센트호는 레이더에 나타난 비행기의 정체를 완전히 확인하기 전에 15㎞ 거리까지 접근하자 발포해 버린것이다. 전쟁은 시간싸움.손자병법에도 『군사는 신속을 귀히 여긴다(兵貴迅速)』고 했다.그러나 금세기초까지도 전쟁의 속도는 말 달리는 속도를 넘지 않았다.내연기관.비행기.전신전화의 발달이 현대의 전쟁을 엄청나게 가속시켜 왔다.그리고 이제 컴 퓨터의 발달이 전쟁을 새로운 차원으로 가속시키고 있다.
첨단장비를 갖춘 비행기와 군함은 이제 수백㎞ 밖에서도 적을 식별하고 공격할 수 있다.이는 같은 수준의 장비를 가진 적도 같은 거리에서 이쪽을 식별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얘기다.당하기전에 공격하라는 전투의 원리가 빈센트호로 하여금 민간인 2백90명의 목숨을 빼앗아 가게 만든 것이다.
과학문명의 발달이 전쟁을 비인간적.야만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역설은 그레고리 롤린스의 『정보화의 불나방(원제:Mothsto The Flame, MIT출판부 刊)』에서 정보화세계를 향한 변화의 한 단면으로 제시한 예다.전쟁의 속도가 자연인의 능력을 넘어서면서 인간의 역할이 배제되고 모든 전투행위는 컴퓨터가 하게 되지만 죽는 일은 인간이 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전쟁 외의 다른 분야에도 비춰 생각할 수 있다.
새로운 모든 기술이 그렇듯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많은 분야의일을 쉽게 만들어주고 있다.산업구조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근로자들은 생산성을 늘리면서도 더 편안하게 작업하고 여가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도입은 산업구조에 변화를 가져온다.전화교환수를 도와주던 컴퓨터가 조금 더 발달하면 전화교환수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비서도 마찬가지고 관리사원도 마찬가지다.산업혁명이 수많은 장인(匠人)들의 일거리를 없애고 기계를 돌 보는 직업으로 블루칼라를 만들었듯 지금의 정보혁명은 화이트칼라의 일거리를줄여 역시 기계를 돌보는 직업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쉬운 일은 품값도 싸게 마련이다.컴퓨터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고 좋아하던 관리사원의 대부분은 몇년후면 컴퓨터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적은 수의 관리사원만이 주어진 프로그램을 가지고 기계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이 분야의 실업률이 높아지고 획일화된 작업에는 사람을 바꾸기가 쉬워지므로 대우는 박해질 것이다.그러나 정보화시대의 산업에서 인력의 중요성은 역 설적으로 높아진다.정보를 처리하는 하드웨어에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물질과 에너지등 자원의 필요가 줄어든다.고정된 시설의 역할이 줄어듦에따라 자본의 중요성도 떨어지는 한편 소프트웨어의 발전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전문인력이 산업의 핵심이 된다.이는 이미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나타난 현상이거니와 정보의 비중이 커지는 모든 분야에서 뒤따라 일어날 현상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모든 변화를 경쟁의 원리에서 바라본다.경쟁은 생명의 본질이다.35억년전 지구에 생명이 나타나자마자 자원의 한계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경쟁에서 이기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생명의 진화는 인간의 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뇌의 발전은 아주 조그마한 변화를 가지고도 활동능력을 엄청나게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뇌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일찌감치 따돌려놓고 자기들 사이에 경쟁을 시작했다.자연적 진화에 만족하지 않고 몸 밖의 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은 이 경쟁이 과열된 결과다.이 몸 밖의 뇌 는 벌써부터인간의 통제능력을 벗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경쟁의 과열상태가계속된다면 컴퓨터 또는 그 후손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리라는 것,인간의 대다수가 이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저자는 단호히 예언한다.
***저자*** 그레고리 롤린스는 인디애나 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알고리듬 발생론과 프로그램 분석방법에 관한 저서들이 있다.컴퓨터의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수학없이 설명해주는 책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책을 손수 쓰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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