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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음악35년' 공연 가진 가야금名人 황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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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936년 서울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학과 졸업 ▶58년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부 우승 ▶85년 미 하버드대 객원교수 ▶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남측대표 ▶90년 송년통일전통음악회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 ▶현재이화여대 국악과 교수,미래악회 회원,문화재 전문위원 ▶주요작품:『비단길』『침향무』『석류집』 깊은 밤에 듣는 가야금 소리는 어쩐지 늦가을 허공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낙엽과 잘 어울리는 것같다.잎새가 가지에서 떨어지는 순간 퉁겨나가듯 허공을 가로지르지만 이내 바람에 휩쓸려 그 힘을 잃고 만다.
줄을 퉁기는 순간 손가락을 벗어난 가야금의 소리도 용틀임 한후 이내 스러지고 만다.그래서 가야금으로 풍류를 즐겼던 선조들은 한편으로 그 소리에서 덧없는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달았던게 아닐까. 가을철은 1년중 가야금 소리가 제일 잘 나는 계절이다.여름 내내 더위와 습기에 시달린 오동나무판이 제목소리를 내는시기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黃秉冀.이화여대 교수)씨가 겨울로 넘어가기 전의 요즘을 놓칠리 없다.
올해 회갑을 맞아 지난 4월부터 광주.대전.부산.전주.대구등지에서 성황리에 펼쳐진 「황병기 창작음악 35년」 공연이 어제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입장권이 매진되는 것으로 따져 「국악계의 스타」를 꼽을라치면판소리의 안숙선.박동진,사물놀이의 김덕수를 떠올리지만 가야금의황병기교수를 빼놓을 수는 없다.이날 공연도 예외는 아니었다.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黃교수가 연출하는 창작 국악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날 공연에서 그의 최초 창작 가야금 독주곡인 『숲』이 가야금 4대와 대금.장구로 편곡돼 연주됐고 장구.중창을 위한 『강강술래』(이동주 詩)『청산도(靑山道)』(박두진 詩)등 모두 9곡이 무대에 올랐다.
또 그의 제자1호인 이재숙(李在淑.서울대교수)씨가 지난 4월黃씨가 완성한 17현 가야금을 위한 독주곡 『달하 노피곰』을 초연했고,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서 초연됐던 『우리는 하나』를 이화여대 조은미교수■안무로 김 미경.성미연씨등 현대무용가 2명이 신체언어로 표현했다.
공연 직전 리허설이 한창인 黃교수는 기자와 만나 「회갑 공연」을 마감하는 감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올해가 마침 데뷔작품인 「국화옆에서」가 발표된지 35년째 되는 해니까 회갑보다 「창작 35년」을 정리하는 무대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88년 뒤늦게 자작곡으로 꾸민 첫 독주회때부터 돈을 받지 않으면,즉 돈이 안될 것같으면 연주 안해요.그저 연주실적이나 올리겠다는 생각으로는 연주 안합니다.』 그는 음반도 로열티를 받지 않으면 결코 녹음하지 않는등 철저한 프로의식과 장인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음반 『침향무』『비단길』『미궁』『밤의 소리』는 국악음반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올라 성음사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최근 국악이 대형무대에 진출하면서 음량확대를 이유로 볼거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번 공연은 단순히 악기 수나 출연진만 불려놓아 눈요깃거리로 만든게 아니라 다양한 악기와 프로그램을 보여주되 한 작품의출연진은 5명 내외로 줄였습니다.춤과 퍼포먼스.노래와 어울리는무대로 꾸몄습니다.』 -창작곡들만으로 무대를 꾸몄는데 작곡가의입장에서 요즘의 창작국악을 어떻게 보십니까.
『무대가 커지다 보니 합주곡.협주곡등 관현악곡 위주로 흐르는데다 음악어법이 서양음악을 따라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자칫하면 국악의 진수에서 이탈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죠.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서양음악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 다.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현대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그러니 젊은 작곡가들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요 .』 -관현악곡 말고 독주곡은 어떻습니까.
『소품들은 악기 자체의 섬세한 뉘앙스를 모르면서 손끝의 기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더 고민하고 파고들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해야 합니다.어쨌든 예술성 높으면서도 인간의 심금을울리는 작품이 나와야겠습니다.슬픔과 비극의 정서 를 밑바탕에 깔아야 합니다.눈물이 나올 정도로 찡한 음악이 기다려지는군요.
』 -이번 공연은 가야금독주곡 『남도환상곡』으로 막을 내리더군요.이 곡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라도 있으신지.
『국악곡 중에서 산조(散調)를 가장 좋아합니다.하지만 산조의틀이라는게 워낙 강해 작곡에 방해될까봐 일부러 작품화하길 꺼려했는데 「남도환상곡」은 가야금산조에 뿌리를 둔 첫 작품입니다.
그래서 창작곡이면서도 장구반주에 추임새를 넣었습 니다.』 -산조의 정신은 우리음악의 진수와도 통하는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산조는 한(恨)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슬픔을 삼키고 난 다음의 희열을 표현하는 것이죠.그래서 우리음악의 진수는「생명의 희열」입니다.그것은 슬픔과 한을 머금고 새긴 후에야 가능한 기쁨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정악 가야금과 산조 가야금을 동시에 마스터한 최초의 국악인이라는 기록도 세우셨지요.
『부산 피난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씨에게 정악 가야금,김윤덕씨에게 산조 가야금을 배웠습니다.그동안 가야금에서도 정악과 민속악이 완전히 구분돼 상호교류가 없었지요.정악 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은 악기부터 다르고 주법이나 음악세계가 전 혀 다르기 때문이죠.창작곡은 또 다른 음악세계입니다.그래서 창작곡을 연주하기 위해 가야금 연주자들이 직접 개인 레슨을 받기도 합니다.』(黃교수의 가야금 작품들은 현재 각 대학 국악과에서 필수곡으로자리잡고 있으며 가야금 연주회에서 「약 방의 감초」처럼 거의 빠지지 않고 연주되는 곡들이다) -국악을 직업으로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서울대 법대 출신이 국악계에 뛰어들어 국악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친구의 권유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가야금 소리가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느껴져 좋았습니다.가야금줄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만으로도 엄청난 감동을 받았지요.12대 종손에다 3대 독자라 법대 입학 후에야 가야금연주금지령이 풀렸고 대학 졸업후에도 한참 후까지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어요.가야금은 저에게 취미가 애정으로,애정이 직업으로 바뀐 케이스입니다.
법률이라는 말에는 이미 음악을 뜻하는 율(律)자가 들어있으니서로 통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지요.대학 졸업후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이던 현제명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국악과 강사를 4년 거쳤지만 국악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7 4년 이화여대국악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부터입니다.』 ***南北음악회 서로큰영향 黃교수는 법대 3학년 가을 문리대 운동장에서 열린 장기자랑에서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섰고 당시 법대 1년 선배인 가수 최희준씨가 노래를 불렀다.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도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단다.그래서인지 그는 해마다 설날이 되면 『봄의 제전』을 크게 틀어 놓고 듣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 90년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와 서울에서 열린 송년통일전통음악회의 남측대표를 맡으셨는데….
『당시 남북이 한번씩 오갔는데도 양쪽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감히 남북 동질성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북한의 개량국악기가 남한에 첫선을 보인 후 남한에서도 개량악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지요.현재 국립국 악관현악단이사용하고 있는 악기들은 모두 개량국악기들입니다.한편 북한에는 전통음악이 민요 외엔 거의 남아있지 않았는데 남북교류후 북한에서 전통음악 발굴 붐이 일었다고 들었습니다.남북 문화교류가 상호 동질성 회복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 실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하지만 정치를 떠나선 남북 문화교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루빨리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 문화교류가 앞당겨져야 합니다.
』 -개량가야금과 전통가야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개량가야금의 장점은 소리가 화려하고 크고 밝다는 점이죠.개인적인 생각으론 전통음악은 전통악기로,창작곡은 개량악기로 연주해야 합니다.악기의 개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악기에 맞는창작곡이 나올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하는 것이기 때문이죠.하프시코드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제 맛이 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94년 국악의 해 이후 국악계가 다소 침체돼 있다는 목소리가높은데….
『정반대입니다.국악의 해 이후 국악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확산되면서 각 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되고 도립.시립 국악관현악단이 창설되는등 「국악 붐」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봅니다. 지금도 국악 무대는 분위기가 뜨겁고 관객이 많은 편입니다.
게다가 지난 10월 국립국악원 예악당이 개관됐으니 국악공연이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됩니다.저는 평소 학생들에게 연주회는성심성의껏 준비하되 생활속의 국악이 자리잡도록 즐기라고 충고하는 편입니다.
서양음악은 연주자와 관객이 분리돼 테크닉 훈련을 과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잘 연습해 다른 사람 기죽이는 것 아닙니까.
서양음악 연주회에 가보면 분위기가 냉랭한 것을 느낄 수 있어요.그러나 국악 연주회에는 틀려도 서로 즐기고 독려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음악보다 우선 즐겁게 사는게 중요하다고생각합니다.』 -이번에 연주된 『미궁』도 초연 당시에는 매우 「전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곡 아닙니까.
『75년 공간사 주최 현대음악제에 출품됐던 곡입니다.그때 연주도중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해프닝이 벌어졌지요.
가야금을 두드려대는데다가 홍신자의 구음(口音)이 충격을 주었나 봅니다.그후 드라마센터에서 앙코르 공연 요청이 들어왔는데 문화공보부에서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공연포기를 권유해 못하고 말았습니다.헐떡이는 소리 때문에 외설적이라 고 생각했나봐요.』(『미궁』은 지난 7월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 50주년 행사 오프닝 콘서트에서도 연주됐다.한 생명의 주기를 가야금 연주와 인성의 혼합으로 표현한 전위적인 작품.첼로의 활로 긋는가 하면 장구채와 거문고의 술대로 두드 려댄다) -어리석은질문 같습니다만 국악인의 길을 걸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계속 가야금만 뜯었다면 후회했을 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사업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손댔다가 실패한 것이오히려 도움이 됐습니다.현재는 음악외엔 다른 미련이 없습니다.
』(黃교수는 27세때 국악강습에서 가야금 소리에 매료된 4년 연상의 소설가 한말숙씨와 결혼,2남 2녀를 두었다) -이번 공연이 앞으로의 창작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젊은 전위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다보니 예술적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젊은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동안 후진양성 때문에 겨를이 없어 관심을 놓았던 현대예술에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년 3월 「현대예술그룹」을 창설해 각계의 실험적 젊은 예술가들을 규합해 실험예술운동을 전개할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왕성한 작품활동과 좋은 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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