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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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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32면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太和殿)의 모습. 권태균 시사미디어 기자

1452년 5월 14일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승하했다. 재위 2년, 한창 때인 39세였다. 『문종실록』은 “신하가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그치지 않았으며, 거리의 소민(小民)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2년 5월 14일)고 쓰고 있다. 문종의 병은 허리 위의 종기(종氣)였는데, 이를 치료한 어의 전순의는 5월 8일 대신들에게 “성상의 종기가 난 곳의 농즙(濃汁)이 흘러나와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혀졌습니다. 오늘부터 처음으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니 예전의 평일과 같습니다”고 말했다. 거의 다 나았다는 말에 대신들은 기뻐하며 물러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 느닷없이 승하한 것이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① 시대를 잘못 읽다

『문종실록』은 “이때 사왕(嗣王·단종)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자 이홍위(李弘暐·단종)는 12세에 불과했으나 모두 그의 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개국 60년 된 조선의 헌정질서였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해야 했으나 그럴 왕대비가 없었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母后) 현덕(顯德)왕후 권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며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분)이 단종을 보좌했다.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계유년(癸酉年:단종 1년)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른여섯 살 수양대군 이유(李유)가 주목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군들의 이심(異心)을 막기 위해 단종 즉위 교서에 분경(奔競) 금지 조항을 넣었다. 이·병조(吏·兵曹) 등의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하는 것이 분경인데, 단종 즉위교서에는 특별히 정부 대신(大臣)과 귀근(貴近) 각처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귀근 각처가 대군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경을 가장 강력하게 금지한 왕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삼군부와 사헌부의 아전(吏)들에게 권세가의 집을 상시 감시하다가 5세(世) 이내의 친족이 아닌 자가 드나들면 무조건 체포해 가두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의 법전인 『속육전(續六典)』은 종친의 정사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굳이 대군들을 분경 금지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분경 금지 조처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수양은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을 불러 “우리에게 분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행세하겠는가”라고 항의했다. 이는 수양이 야심을 노골화한 것이므로 의정부 정승들은 『속육전』을 들어 강하게 반박하고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은 탄핵해야 했으나 영의정 황보인은 크게 놀라 대군 집의 분경 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이것이 숱한 비극의 단서였다. 수양이 항의한 것은 자신이 사람 만나는 것을 제한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분경 금지 조처에서 해제된 것을 계기로 수양은 다양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신숙주(申叔舟)나 권남(權擥) 같은 벼슬아치도 있었고, 한명회(韓明澮) 같은 낙방거사도 있었다. 음서(蔭敍)로 종9품 경덕궁(敬德宮:태조의 개경 잠저)지기가 된 한명회를 두고 수양대군은 “예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극찬하면서 국사(國士)로까지 높이 평가했다. 당초 친구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보라고 권했던 인물이 한명회였다. 과거에 거듭 낙방한 한명회에게 정상적 헌정질서 속에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수양의 야심과 결탁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라고 권한 것이다. 한명회는 이미 수양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지위와 돈과 술을 이용해 숱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수양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나라의 동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단종 즉위년(1452) 9월 10일 수양대군은 스스로 고명(顧命) 사은사를 자청한 것이다.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대군이 가기를 청하니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말하자 단종은 답을 하지 않다가 선왕의 부마(駙馬)를 사은사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미 수양에게 붙은 강맹경은 부마들이 병들어서 안 된다고 반대했고, 수양대군은 거듭 자청해 드디어 사은사로 낙점되었다.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단종실록)』는 이때의 사신 길이 무척 위험한 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단종 즉위년 10월 11일자는 수양대군이 이복동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증)에게 “국가의 안위가 이 한 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매일 밤 대왕대비(大王大妃:세조비 윤씨)가 몰래 울었고, 세조도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원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사신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명에서 통상 관례에 따라 단종에게 국왕 책봉 고명(誥命)을 내린 데 대한 답례사일 뿐이었다. 쿠데타를 결심한 수양에게는 ‘이 한 번의 행차’가 중요했는지 몰랐지만 이는 그의 사정일 뿐이었다. 후세의 비난이 두려워 편찬자의 이름도 적지 못한 『노산군일기』는 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종친이 베푼 전별식에서 수양이 홀로 취하지 않자 양녕대군과 태종의 서자 경녕군(敬寧君)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양녕이 수양에게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도 적고 있다. 임금 이외의 인물에게 ‘천명’이란 용어를 썼다면 그 자체가 ‘역모’였다. 수양은 사신으로 가면서 영의정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일종의 인질로 데려갔다.

이 무렵 명나라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조선은 태종~문종을 거치며 국력이 크게 신장돼 있었다. 명의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3년 전인 1449년(세종 31년) 8월 몽골군과 전쟁에 나섰다가 현재의 허베이(河北)성 화이라이(懷來)현 부근의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패했다. 대군은 궤멸되고 영종은 생포되는 ‘토목의 변(土木之變)’이었다. 몽골군은 베이징(北京)까지 공격했다.

영종은 이듬해 몽골군이 풀어주는 바람에 귀국했으나 베이징 남지자(南池子)에 있는 남궁(南宮)에 유폐되어야 했다. 영종의 동생인 대종(代宗:재위 1449~1457) 주기옥(朱祁鈺)이 즉위했으나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수양이 사신으로 간 것은 이런 때로서 주변 국가들이 명을 우습게 볼 때였다. 그러나 양녕은 대종이 예부 낭중(郎中)을 시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하자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받았다. 예부 낭중 웅장(熊壯)이 놀라 일어나면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감탄했다고 『노산군일기』는 전한다. 조선 국왕의 숙부가 일개 낭중에게 통상 예법을 뛰어넘어 과공(過恭)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수양은 저자세 외교로 일관함으로써 권위가 땅에 추락한 명 왕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명의 지지를 확신한 수양은 쿠데타를 결심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태종처럼 왕위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때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태종 때는 질서를 만들던 시기이고 이때는 질서가 잡힌 시대였다. 태종~문종대를 거치며 유학이 사회의 주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그렇게 유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