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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高麗史 출간 붐-"한권으로 읽는 고려..."등 3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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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 역사의 허리」 고려(高麗)가 새로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역사의 소외공간 고려를 폭넓게 다룬 교양서가 속속 나오고 있다.난세의 지혜를 과거에서 찾으려는 현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듯 최근 부쩍 늘어난 역사서 출간붐을 타고 그동안 홀대받았던 고려도 새롭게 되돌아보자는 시도다.
고려는 학술적으로도 연구가 비교적 미흡한 시기.삼국시대가 민족적 동경의 대상으로,조선시대가 근.현대의 여러 모순을 잉태한비판적 대상으로 부각된 반면 고려는 두 시기 사이에서 동경도 비판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또한 부끄럽게도 출판계는 일반인 대상의 고려사 한 권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학문의대중화를 놓고 볼 때 고려는 아직도 넓은 미개척지인 셈.
잊혀져 가던 고려를 되살리는 작업은 사실 미술에서 먼저 시작됐다.지난해 여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대고려국보전」이 그것으로 1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현란한 고려 귀족예술의 진수를 만끽했다. 이런 상황에서 올초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놓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박영규(朴瑛圭)씨가 새로 펴낸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들녘刊),소설가 최범서(崔凡緖)씨가 엮은 『이야기 고려왕조사』(청아출판사刊),역사서술에 일간신문의 형식을 도입한 『역사신문 2』(사계절刊)등이 그동안 역사의 뒤안에 파묻혔던 고려의 총체적 복원을 모색하고 나섰다.아직은 두텁게 드리운 표피를 벗겨내는 수준이지만 그동안 막연하게추측했던 고려의 본모습을 가능한 한 알기 쉽 게 전달한다.
『한 권으로…』에서 저자 朴씨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첫째 조선사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말라.둘째 삼국과 조선을잇는 징검다리로 이해하지 말라 등.고려사는 고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나머지 두 책도 엇비슷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삼국.조선시대와 변별(辨別)되는 고려의 독자성은 무엇인가.무엇 때문에 고려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시점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가.
저자들은 그 해답을 무엇보다 고려가 한반도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찾는다.당나라 힘을 빌린 신라와 달리 고려는 발해유민.신라왕실.후백제 권부를 끌어안으며 말 그대로 민족화합책을 도모했다.외세의존 없이 대립하던 세력 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정치적 관용이 돋보인다.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숙제를 짊어진 우리들의 진로에 훌륭한 전례가 된다.
고려인의 자주성도 두드러진다.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이 지킬 도리를 적은 『훈요십조』에서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라』고 충고한다.유교개혁론자 최승로(崔承老)가 6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 」에도 고려의 고유한 풍속을 준수하라는 주문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식의 편협한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특히 현실감각을 발휘해 실리와 대의명분을 함께 좇은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걸었다.중국에서만 송(宋).요(遼).금(金).원(元)나라가 명멸하고 끝없는 외침으로 국토가 수차례나 유린되는 혼란스런 정세속에서도 때로는 강하게,때로는 부드럽게 밀고당기면서 5백년의 역사를 쌓아갔다.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는 오늘날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고려의 유연성은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돼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신비스런 빛을 발하는 고려청자,세계 최초의 금속활자,화려하기 그지없는 불화와 나전칠기등을 창조했다.해외문화를 다양하게 수용하면서도 이를 다시 고려풍으 로 걸러내는독창성이 특출했다.문화가 상품으로,나아가 국력으로 부상한 문화전쟁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또한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며 고토(故土)회복,즉 북진정책을끊임없이 추진한 진취성도 현대인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손꼽힌다.
반면 이 책들은 모두 왕조중심의 서술에 치우쳐 고려인들의 살아 있는 숨소리를 전달하는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때문에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전공자들의 분발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다.통사(通史) 차원을 넘어 풍속.의식주.여성의 지위등 생활의 구석구석을 다룬 교양서가 빨리 나오기를 기대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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