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폰 보여주면 ‘와, 신기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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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한국통신의 자회사 한국이동통신 입사
1988년 7월 한국 첫 휴대전화 서비스망 구축
1994년 1월 SK텔레콤 시설부
2008년 현재 SK텔레콤 수도권 네트워크본부 전송팀장

이코노미스트 "따르릉 따르릉.”자전거 소리가 아니다. 1950년대 ‘부의 상징’이었다던 집전화 벨소리가 SK텔레콤의 첨단 서비스망을 책임지고 있는 보라매 사옥 1층 운용팀에 울려 퍼진다. 이 휴대전화 벨소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에 휴대전화 서비스를 처음으로 보급한 주역 김서규(50) SK텔레콤 수도권 네트워크본부 전송팀장.

휴대전화 서비스의 산 증인 #1988년 입사한 SK텔레콤 김서규씨…“20년 뒤는 상상도 안 가”

그는 “지금은 온갖 벨소리가 다 나와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옛날 집전화 벨소리로 돌려놨다”며 웃는다. 김 팀장은 1988년 6월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에 입사해 시설부로 발령 받았다. 휴대전화 개통을 한 달 남긴 초긴장 상태의 회사에 들어간 신입사원 김서규. 시설부는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계획하고 이와 관련된 장비를 구매해 설치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그가 입사할 당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전장이었다.

“이미 차량용 전화(카폰) 서비스를 1983년부터 해왔고 경쟁사도 없었으니 특별하게 긴장감이 돌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시스템을 통째로 들여놓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태스크포스팀 같은 것도 없었죠. 시중에 알려진 것처럼 서울 올림픽 때 방문한 내빈들 쓰라고 만든 것도 아니에요. 기지국이라곤 16개가 고작인데 통화품질이 어디 내놓을 만한 건 못 됐죠.”

1988년 7월 1일 첫 통화가 시작된 휴대전화다. 신입사원이 뭘 알았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시설부라고 해도 저까지 5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들어가자마자 휴대전화망 구축에 실전 투입된 거 아닙니까. 외국산 서비스를 그대로 들여왔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생소했고 그런 만큼 낮밤 안 가리고 뛰어야 했습니다.”

이때까지 한국이동통신은 차량용 이동전화 서비스에 주안점을 뒀기 때문에 서울 시내 기지국 16개는 대부분 대로변에 있었다.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통화는 뚝뚝 끊겼다. 단말기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벽돌폰’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초창기 휴대전화 단말기는 무게가 1㎏에다 말 그대로 벽돌만 했으니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없었다.

이용자들도 딱히 주머니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모토로라 제품이었던 벽돌폰의 당시 가격은 400만원을 호가했다. 88년 현대자동차의 포니나 엑셀이 500만원이었으니 ‘부의 상징’ 혹은 ‘신기한 물건’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이 속한 시설부는 휴대전화 서비스 품질을 측정하는 것도 주요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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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측정기기라 할 만한 게 없으니 직원들이 서울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며 직접 통화를 해 품질을 측정했다. 카폰 품질 측정을 위해 속력을 내다가 교통경찰에 과속으로 걸린 일은 셀 수도 없다. 음식점에라도 가면 시설부는 인기 폭발이었다. 벽돌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 식당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한번 써 보시라’고 선심을 쓰기도 했다.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처음 써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김 팀장의 큰 즐거움이었다. 모든 것이 통제대상이었던 1988년에는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전에 정부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일종의 보안교육이었다. 어떤 용도로 써야 하고 이런저런 것을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이듬해부터 휴대전화 서비스는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탄력을 받았다. 전국 35개 도시와 경부, 호남, 중부, 구마 4개 고속도로에서 통화가 가능하게 됐다. 이어 1993년에는 전국 74개 시 전부와 107개 읍, 그리고 주요 고속도로 주변에서도 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대중화의 물결을 탄 것.

김 팀장에게 기자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을 건네봤다. 스마트폰은 PDA기기와 휴대전화를 결합한 단말기다. “매일 보는 게 휴대전화니 뭐 놀랍지는 않지만…. 그때는 그저 음성통화 기능 하나밖에 없으니 통화라도 안 끊기고 잘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지. 국산 제품도 지금과 달리 기지국 안테나 정도밖에는 없었고요.”

김 팀장이 근무하고 있는 SK텔레콤 보라매사옥 지하에는 서울 시내와 전국으로 내달리는 수천 가닥의 굵직한 광통신망이 매설돼 있다. 그는 지금도 휴대전화 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부문을 지키고 있다. 김 팀장이 생각하는 20년 후의 휴대전화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없으면 인생이 재미없어지고 모든 정보가 집결되는 필수품이 돼 있을 것은 확실하다”고 운을 뗀다.

현재 3세대인 휴대전화 서비스가 2012년이면 4세대가 된다.“2028년의 휴대전화가 얼마나 발전할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1988년에 휴대전화가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휴대전화의 역사

처음엔 기본료만 월 2만7000원

1988년 7월 1일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은 미국 AT&T사가 1978년 세계 최초로 운용에 성공한 아날로그(AMPS: Advanced Mobile Phone Service) 방식의 이동전화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차량에 설치하는 카폰이 1984년 서비스된 지 4년 만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휴대용 이동전화 서비스가 탄생한 것. 1988년 7월 수도권과 부산지역에서 개시된 휴대전화 서비스의 기본료는 월 2만7000원, 통화료는 서울∼부산 간 3분을 기준으로 1286원이었다.

특히 휴대전화 단말기 가격은 초창기 400만원 정도였다. 휴대전화는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 대우받았다. 1996년 신세기통신에 이어 1997년 PCS 3사가 등장하며 경쟁을 통한 성장을 기록한다.

2008년 5월 말 현재 한국의 휴대전화 이용자는 4473만8000명으로 인구 대비 92.2%의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CDMA 세계 첫 상용화에 이어 세계 최초 DMB방송 실시 등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서비스를 갖춘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은 전 세계 휴대전화 이용자의 27%가 한국산 단말기를 사용할 만큼 세계적인 휴대전화 강국이 됐다. 2006년 기준 휴대전화 시장은 248조원 규모다.

세상 바꾼 문자메시지 SMS의 힘
필리핀 대통령 하야시키기도

1996년 1월 휴대전화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일대 변신을 꾀한다. 이로 인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SMS)를 보낼 수 있게 된 것. 문자메시지는 개발자들이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2000년 9월 영국에서 수천 명의 국민이 휘발유 가격의 급작스러운 인상에 격분해 기습 정치집회를 열어 특정 정유소로 흩어져 연료 배달을 차단키로 한다. 이때 시위집단이 서로 연락을 취하며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 문자메시지의 힘이다.

2001년에는 문자메시지로 모인 국민이 대통령을 하야시키기까지 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에스다 거리에 시민 100만 명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에스트라다 당시 필리핀 대통령 하야 시위를 벌였다.

시민단체들이 100만 명이 넘는 시민에게 “에드사(Edsa) 거리로 갈 것, 흑의 착용”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시위로 결국 하야한 에스트라다는 역사상 ‘영리한 군중(Smart mob)’의 문자 쿠데타(Coup d’text)에 의해 권력을 잃은 최초의 국가 수반이 된다.

한국에서도 각종 정치모임에서 쉽게 문자메시지를 볼 수 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이후 투표 전날 결별하자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이 이를 문자메시지로 알려 투표율을 끌어올렸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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