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19.가정인가 하숙집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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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의 사회학자 잉그하트는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세대별 가치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로 꼽고 있다.그의 주장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내면적 거리가 가장 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가족간의 유대가 서양보다 앞선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얘기다.
그러나 더욱 할말이 없는 것은 우리의 가족문제 전문가들조차 우리 가정을 부모 자식간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도 갈등을 보이는「정서적인 이산(離散)가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겉만 가깝고 속은 먼」 이들이 한지붕아 래 어울려 사는 셈이다.
주부 김인영(金仁瑛.47.서울강남구대치동)씨는 어디서 전화라도 걸려오지 않으면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많다.대기업 이사로 있는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해 오후10시를 넘겨 돌아오는 것은 기본이고 술이라도 한잔 하는 날이면 자정을 훌쩍 넘긴다.게다가 휴일 출근과 해외출장도 많다.
대학 4학년인 딸은 학교도서관이 공부하기 좋다며 오후11시가넘어야 집에 들어오고,고2인 아들은 그나마 얼굴보기가 더 힘들다.학교를 마치면 밤늦게까지 사설독서실에 파묻혀 있는 것이 일상이고 어쩌다 마주쳐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 간 보내기도 부담스럽다.
金씨는 『가족하고는 「밥 먹었니」「피곤할텐데 씻고 자라」는 얘기를 하는게 고작이지요.전화통이라도 붙잡고 수다를 떨지 않으면 미칠 것같아요』라고 말한다.
최근 우리 사회는 회사안의 경쟁,취업전쟁,입시전쟁등으로 인한가정의 해체현상이 두드러져 金씨와 같은 가슴앓이를 하는 주부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연세대 여성연구소 손승영(孫承瑛)전문연구원은 『우리 사회는 가족구성원들이 가정에서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사회안에서 그들의욕구를 만족시키려 한다.예컨대 수험생은 집보다 또래집단이 모이는 독서실을 선호하고,남편은 집에서 술을 마시기 보다 술집에서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등이다.이같은 의식과 함께 직장.학교등에서 나타나는 경쟁사회의 생리는 가족들을 집으로부터 멀어지게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강영옥(姜英玉.56)주부는 아들 삼형제를두고 있다.첫째는 대학원에,둘째는 군대,막내는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지난해 정년퇴임한 남편과 姜씨는 서로를 「하숙집 주인」으로 부른다.왜냐하면 姜씨 부부가 하는 일이란 자식들 밥해주는일과 빨래.청소 정도가 고작이다.집에 있는 두아들 모두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니 같이 TV 볼 시간도,식사할 시간도없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통 집에 있는 시간이 없으니.한번은 외식할테니 일찍 들어오라고 일렀더니 아들 둘다 쑥스럽게 무슨 외식이냐고 정색을 하더군요.그래서 요즘 남편과 저는 자식과 같이 지낸다는 생각은 아예 포기했습니다』며 姜씨는 씁쓸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정신적 이산 상태는 이처럼 심각하다.정신적 이산은 가족의 무관심을 초래한다.예컨대 입시생의 늦은 귀가가 당연시되면서 이를 이용해 탈선(脫線)의 길로 접어드는 청소년이 생기고,회사일로 합리화하면서 상습적으로 술 을 마시는 남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족문제 전문가들은 가족은 혈연집단이므로 무조건 뭉칠 수 있다는 신화(神話)는 현대 가족에서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는 논리라고 잘라 말한다.더구나 과거에는 집안의 가장만 집에 일찍 들어온다거나 주말에 시간을 내면 가족이 쉽게 모일 수 있었지만일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자녀들의 개인생활도 존중받는 분위기에선그마저 어렵게 됐다.
이화여대 이동원(李東瑗.사회학과)교수는 『하숙집처럼 돼버린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선 인위적인 가족의 노력이 필요하다.가족회의등을 통해 의무적으로 모이는 시간을 정하고 가족프로그램도 마련해야 한다.
또 최근 만들어진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처럼 가장이 집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흩어진 가족을 집안으로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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