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호주를 주목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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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호주 시드니에는 ‘하이드 파크 배럭스’란 박물관이 있다. 영국에서 호주 대륙으로 강제 이송돼 온 유형수(流刑囚)들이 기거했던 숙소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곳에 전시된 범죄 기록을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토머스 홀딩-1829년 도착, 플린셔 출생, 말(馬) 절도, 종신형. 윌리엄 맥멀린-1828년 도착, 더블린 출생, 소매치기, 7년형…. 수형자들의 죄목과 형량이 깨알 같이 적혀 있다. 양(羊)을 훔친 경우는 7년이지만 말을 훔쳤으면 종신형이다. 단순절도는 7년, 노상강도는 종신형이다. 옷이나 손수건을 훔친 죄로 7년형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영국에는 수많은 도시 빈민이 생겨난다. 생존의 기로에서 그들이 저지른 사소한 생계형 범죄를 영국 정부는 엄벌로 다스렸다. 초기 자본주의의 가혹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적 낙오자들에게 상식 밖의 중형과 함께 비인도적 격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 자본주의의 영광 뒤에는 유형수들의 피와 눈물이 숨어 있다.

죄수들의 유배지로 출발한 호주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으로 따져 호주는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나 독일보다 잘사는 나라가 됐다. 두바이에 본부를 둔 국제투자그룹 레가툼이 104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주 발표한 ‘국가번영지수’에서 호주는 1위를 차지했다. 경제적 건전성과 ‘삶의 질’ 평가에서 호주가 가장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2008년 순위에서 멜버른(2위), 퍼스(4위), 애들레이드(7위), 시드니(9위) 등 호주 도시들이 10위권을 휩쓸었다.

“호주에 가면 자유를 느낀다”고 영국 작가 D H 로런스는 말했지만 내가 시드니에서 느낀 것은 자유의 공기만이 아니었다. 시내 곳곳에 녹아 있는 부(富)의 흔적과 유산, 자연과 인공의 조화, 첨단과 전통의 공존, 다문화적 개방성, 인간에 대한 친환경적 배려…. 요컨대 자유와 번영이었다. 알래스카를 뺀 미국과 맞먹는 넓은 국토. 21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인구. 무궁무진한 천연자원. 그것이 비결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국인 출신으로 호주에서 거의 30년을 산 김형아 호주국립대학 교수는 ‘호주식 평등주의(Australian Egalitarianism)’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낯선 땅에서 억압과 고통을 공유한 유형수들의 형제적 동질감에서 비롯된 호주식 평등 의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호주식 평등주의는 웃자란 양귀비를 쳐내듯 혼자만 잘나가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키 큰 양귀비 신드롬(Tall Poppy Syndrome)’을 낳기도 했지만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이동성을 중시하는 문화적 배경이 됐다. 그 결과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추구하면서도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사회적 형평성을 함께 고려하는 초당파적 공감대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호주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케빈 러드 총리의 지지율은 되레 올라가고 있다. 호주 정부의 신속한 대응에 국민과 시장이 신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러드 총리는 이번 사태를 ‘경제적 국가안보 위기’로 규정하고, 강력한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은행 예금에 대해 정부가 3년간 지급을 보증하고, 은행들의 대외 채무를 보증키로 했다. 또 경기 후퇴를 막기 위해 104억 호주달러(약 9조원)를 풀어 민생 안정과 경기 활성화에 나섰다. 금융위기 이후 러드 총리의 지지율은 10%포인트가 뛰어 71%까지 치솟았다. 탄탄한 국정(거버넌스)은 호주 번영의 또 다른 열쇠다.

뭐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극단은 도그마일 뿐이다. 시장 만능의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새삼 호주를 주목하는 이유다.

<시드니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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