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25년간 남북대화 사무국에서 일해온 정시성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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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 사람과 만남 5백여회,방북 8차례….
오는 1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1일자로 남북대화사무국장직에서물러난 鄭時成(61)씨가 보유한 기록이다.25년간 「외도」않고한길 인생을 걸어왔기에 가능했다.남북회담때 북한측이 그의 참가여부를 우선 점검할 정도로 손꼽히는 북한통인 鄭국장은 기자에게『내 퇴임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북한측 회담대표들일 것』이라며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재직중 가장 인상깊었던 사건을 꼽는다면요.
『85년8월 적십자회담때의 모란봉경기장(현 김일성 경기장)퇴장사건을 들지않을 수 없습니다.제가 실무단장 자격으로 방북했는데 체류일정은 남북양측이 미리 합의한대로 이행되는게 원칙이죠.
그런데 북측이 예정에 없던 어린이 무용체조를 한번 관람하자고 제의해왔습니다.장소도 처음에는 옥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야외라고 말을 바꾸더군요.「별일 있겠느냐」는 생각에 따라 갔는데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수만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김일성의 일대기를 묘사하는 매스게임을 펼치는게 아닙니까.서울본부에서 즉각철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대표들에게 연락을 취하는데 움직이지 않더라고요.북한측 안내원들이 「뭐 나갈 것 있습니까.계속보시죠」하면서 못나가게 하는거예요.결국 제가 李榮德수석대표(전국무총리)등 대표단 .자문위원들을 일일이 들어서 밖으로 끌어내다시피 했죠.그러자 북측 대표단 실세였던 강석숭(현 당역사연구소장)이 저를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 「서울 돌아갈 생각말라」고위협하더군요.』 -방북시 북한측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술자리를 만들어놓고 돌려가면서 술을 권하지요.사실상 고문입니다.잠도 못자게 합니다.정식대표들에겐 그렇지 않지만 유독 저에겐 그랬습니다.한번은 새벽5시쯤인데 어떤 안내원이 문을 두들겨요.「노동신문을 전달하러 왔다」는 거예요.「방문 밑으로 넣으면 되는데 왜 깨우느냐」고 항의했죠.그랬더니 「수령님을 모신 신문을 어떻게 개구멍으로 밀어넣느냐」고 대들더군요.안내원이 돌아간후 노동신문을 방바닥에 던져버렸죠.잠시후 그 안내원이 다시찾아와 「내 선생이 그럴줄 알았다」면 서 화를 냅디다.』 -곤욕을 치른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역시 85년 적십자회담때입니다.네번째 방북이었는데,북한은 두번만 가면 구경할게 없어요.그래서 북측 관계자에게 평양지하철을 구경하겠다고 했더니 펄쩍 뜁디다.그러다간 「정선생은 우리가각별하게 대우해야 할 사람이니 상부에 알아보겠다 」고 해요.이렇게 해서 대표단과 함께 평양지하철을 구경하게 됐는데 서울에 돌아와 「독단적으로 행동했다」고 혼났습니다.이럴 만큼 남북접촉은 엄격합니다.모란봉경기장 퇴장때 「수훈」을 세운 점이 감안돼간신히 넘어갔습니다만.』 -북측 대표들과 비공식 자리에선 「은밀한 얘기」도 한다는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몇차례 남북접촉을 하다보면 대표들간에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 남북 대표들이한쌍 있었습니다.그 북측 대표가 「선생,만약 우리가 남을 통일시키면 선생을 내가 봐드릴테니 만약 남이 북을 흡수하면 선생이나를 봐주쇼」라고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이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고 대부분은 협박조죠.92년9월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북한책임연락관 최봉춘은 「남조선이 잘 산다고 방자하게 굴면 큰일난다.평양에서 버튼만 하나 누르 면 남한의 핵발전소를 단번에 폭파시킬 수 있다」고 엄포를 놓더군요.사석에서는 불바다발언을 예사로 합니다.』 -북측 대화일꾼중 인상에 남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저의 카운터 파트였던 林春吉입니다.그는 80년,90년대 남북대화에서 북측 대표를 진두지휘한 실세였죠.북측 단장이었던 延亨默전총리도 그의 지휘를 받았고,우리측 대표단을 김일성에게 안내한 것도 그였습니다.당시 직책은 정치국 부부장이 라고만했는데 실제로는 그 이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남북대화 업무에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71년 감사원에 원서를 내러 갔습니다.그런데 누가 다른 건물로 데려갑디다.당시 중앙정보부 간부였던 鄭洪鎭씨였습니다.「남자가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되는 것 아니냐」면서 남북적십자회담사무국을 창설하는데 같이 일하자는 겁니다.이 일을 하다보면 고향인 신의주에 남보다 빨리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응낙했죠.』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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