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경기 소감은 그날 경기장에 버리고 가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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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박찬호와 통화를 했다. 그는 LA 다저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나서부터 연락이 없었다. 시카고 컵스와의 디비전시리즈는 원정으로 시작했고 단기전에서의 선수단 이동이 타이트해 그러려니 했다. 한편으론 디비전시리즈 3게임 동안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그가 뭔가 실망하거나 우울해 연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필라델피아와의 리그 챔피언결정전이 시작되고 나서도 그랬다.

그가 모처럼 수화기 너머에 나타난 그날은 다저스가 치명적 경기를 잃어버린 날 이었다. 1승2패로 뒤진 4차전에서 3-2, 5-3으로 앞서다가 역전패한 날, 지난 14일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울렸다. 그래서 “여보세요” 하는 순간에 풀이 팍 죽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와~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로 입을 연 그는 전혀 풀이 죽어 있지 않았다. 3-2로 앞선 6회 초 1사 2, 3루에서 마운드에 올라 첫 타자를 짧은 외야플라이로 잡아냈지만 곧바로 이어진 자신의 폭투 때문에 동점을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던, 그 실망스러운 등판의 그림자가 그에겐 없었다. 속으로 의아해하면서 “어떻게 된 거야 오늘?” 하고 주제를 투구 내용이나 팀 분위기 쪽으로 몰아갔다.

“운이 없었죠 뭐. 아직 커 가는 선수도 많고… 이 팀이 아직 그 정도잖아요.” 그는 남의 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그 유니폼을 입고, 조금 전까지 함께 뛰다 나온 선수 같지 않았다. “이제 1승3패라 한 게임만 지면 탈락인데, 월드시리즈 갈 수 있겠어?” 아주 의례적으로,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용수철처럼 대답이 튀어나왔다. “지금부터 3승 해야죠. 하면 되죠.” 아, 이건 무슨 우문현답인가. 근데 리바이벌 분위기가 들었다. 그래서 어디서 들었을까를 생각했고 곧 기억해 냈다. 롯데 로이스터 감독이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을 삼성에게 내주고 나서 “지금부터 3승 하면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했다.

“그거밖에 없잖아요. 지금 흘린 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죠. 그래서 경기장 나오면 다 잊어요. 아쉬운 건 물론이고 좋았던 기억도. 중요한 건 이제부터니까요. 지금 빨리 가서 아이들 보고 싶어요. 얼마나 많이 컸는데요. 애들이 둘이 되니까 집안이 정신이 없어요. 큰애 하나 있을 때 하고는 완전 달라요.”

그는 그날 경기에 대한 아쉬움, 마운드에서의 좋고 좋지 못했던 점을 되새겨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년 시즌에 대한 구상, 그에 따른 WBC 참가 여부, 연말에 있을 동생의 결혼식,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뒤 생긴 변화 등에 대해 수다를 떨 듯 늘어놓았다.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지워졌을 리야 없겠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지나간 일보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려 했다. 2005년 통산 100승을 거둔 날 그는 “100승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 통화에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과정에서 체득한 ‘긍정의 힘’을 느꼈다. 로이스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태일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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