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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태평성대를 위하여, 수고는 모두 내게 맡겨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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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태종은 세종에게도 혹독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심온(沈溫) 사건을 계기로 명과의 외교를 중시하면서 권신의 발호를 억제하는 법을 가르치고 군사를 동원해 왜구를 소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명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오늘의 영광에 집착해 미래를 망각하는 현재의 정치가에게 교훈이 될 만한 사례다.

대마도 정벌(44.7Χ73cm), 우승우(한국화가).

1399년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4남인 연왕(燕王) 주체(朱逮)는 조카인 혜제(惠帝)를 축출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양측이 수십만 병사를 동원하는 내전이 3년간 지속되었는데, 정도전이 살아 있었다면 이 혼란기를 이용해 북벌을 단행했을 개연성이 크다. 1402년 내전에서 승리한 연왕 주체가 영락제(永樂帝)라 불리는 성조(成祖)이다. 영락제는 정화(鄭和)에게 62척의 대선단과 2만7800명의 대군을 주어 대항해를 시키고, 세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는데, ‘적 1000명을 죽이고, 아군 800명을 잃는(殺敵一千, 自損八百)’ 격렬한 전투였다. 조선을 경악시킨 것은 안남(安南·베트남) 정벌이었다. 안남은 1226년 태종 트란 찬(陳昺·Tran Canh)이 건중(建中)을 연호로 진조(陳朝)를 개창했는데, 1400년 호 꾸이 리(胡季리·Ho Quy Ly·1336~1407)가 진조의 마지막 황제 트란 안(陳 ·Tran An)을 내쫓고 호조(胡朝)를 개창했다. 그런데 영락제는 뒤늦은 1406년 정이장군(征夷將軍) 주능(朱能)에게 80만 대군을 주어 호 꾸이 리 부자를 베이징으로 납치했다. 영락제는 당초 “진씨 자손 중에서 현자를 세우겠다”고 말했으나 막상 승전하자 ‘호씨가 진씨를 모조리 죽여 계승할 사람이 없다’며 직할지로 삼아버렸다.

신생 조선에 안남 사례는 큰 공포였다. 태종은 안남 사태를 논의할 때 “나는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고 말했다.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방어 준비도 철저히 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 8월 왕위 교체를 알리는 사은주문사를 신의왕후 한씨의 친척 한장수(韓長壽)에서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으로 교체한 것도 명과의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자 교체 직후 왕위까지 바뀐 데 대해 명이 의혹을 품을 수 있었기에 신왕의 장인이자 명나라 환관태감 황엄과 친한 심온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해 9월 태종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다”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승진시켰다.

『세종실록』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순서를 뛰어넘어 수상(首相)에 오르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심온은 불과 44세였는데, 『연려실기술』은 “상왕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하에게 쏠린 권력을 구경하고 있을 태종이 아니었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기 보름 전인 8월 25일 발생한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의 옥사’가 심온 제거에 이용되었다. 상왕은 양위 후에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하겠다”며 군사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태종은 “내가 군사 문제에 대해 듣는 것이 사직(社稷)에 무엇이 나쁘겠냐(『세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면서 강상인과 병조 낭청(郎廳) 등을 의금부에 하옥해 국문했다.

이들은 모두 군권을 세종에게 돌리려는 뜻이 아니라 ‘사리를 잘 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변명해 강상인이 함경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심온의 전별식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이 사건을 재조사시켰다. 임금의 경호부대를 관할하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沈<6CDF>)이 심온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여(黨與)를 대라는 심한 추궁을 받은 강상인은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날이 저물 무렵 심온의 집에 가서 ‘군사는 마땅히 한곳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했더니 심온도 ‘옳다’고 했습니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22일)라고 심온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강상인이 관련자들과의 대질신문에서 “고초를 견디지 못했을 뿐 실상은 모두 무함(誣陷)이었다”며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고 부인하는 등 무리한 옥사였다. 강상인은 심온 귀국 전 수레에 올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매( 楚)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고 외치며 능지처참 당했고, 귀국길에 체포된 심온은 관련자 대질을 요청했지만 “이미 황천객이 되었으니 어찌 만나겠느냐?”는 태종의 싸늘한 답변과 함께 사약을 마셔야 했다. 『세종실록』은 충녕이 세자가 된 직후 심온이 “지금 사대부들이 나를 보면 모두 은근(慇懃)한 뜻을 보내니 내가 심히 두렵습니다. 마땅히 손님을 사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세종에게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심히 옳게 여겼다(즉위년 12월 25일)’고 전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의 다짐을 잊고 전별식 사건을 방치한 것이었다. 세종은 자신도 폐위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태종은 좌의정 박은에게 “나의 여생은 많지 않고 본 것은 많으므로 이런 대간(大姦)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죽기 전에 심온을 제거해 세종에게 안정된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이었다.

태종은 왜구 문제 해결책도 가르쳐주었다.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왜구 전문가였다. 그래서 건국 후 “옛날과 비교하여 왜적들이 10분의 8, 9는 감소되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0일)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 즉위년(1418)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계승하면서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왜구가 다시 창궐했다. 세종 1년(1419)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庇仁縣)을 습격해 만호 김성길(金成吉) 부자를 전사시키자 태종은 격분했다.

그는 세종과 대신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때 병조판서 조말생만이 선제공격에 동조하고 나머지는 ‘적이 공격하는 것을 기다려 치는 것이 좋다’고 반대했다. 태종은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세종실록』 1년 5월 14일)라면서 대마도 정벌을 결정했다. 태종은 신민(臣民)에게 고하는 글에서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던 것”이라면서 군사를 출진시켰다. 이것이 기해동정(己亥東征)인데 그해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는 227척의 병선에 1만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거제도를 떠나 7월 3일 귀환할 때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재정벌이 논의되는 와중인 9월 20일 대마도주 종정성은 예조판서에게 항복하기를 비는 신서(信書)를 바쳤다. “기해동정 이후 왜구들이 천위(天威)에 굴복해 감히 포학(暴虐)을 부리지 못했다”(『세종실록』12년 4월 12일)는 기록처럼 왜구는 크게 위축되었다.

세종 3년 허물어진 도성(都城)의 수축 문제가 나오자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도성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수고함이 없이 오래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수고를 맡고 편안함을 주상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세종실록, 3년 10월 13일)라고 말했다. 악역은 자신이 맡고 그 공은 후계자에게 돌리겠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해 측근 공신을 제거하고 후계자를 미리 양성했으며, 자신을 희생해 내일을 준비한 태종 같은 거인이 그리운 시대다. <태종 끝>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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