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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프터, 오페라 무대의 콘트롤 타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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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극장에서 가수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무대를 보고 있지만 공연 내내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랴 연기하랴 바쁘게 움직이는 가수들을 위해 가사의 첫 마디와 리듬을 양손과 입술을 통해 알려주는 프롬프터(prompter)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다. 그의 얼굴이 객석에 보이면 무대의 환상이 산산 조각이 나고 만다. 그가 잠시 꾸벅 졸았다고 해서 ‘대형 사고’까지 터지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공연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프롬프터는 관객들에겐 ‘얼굴 없는 스태프’에 불과하지만, 오페라 극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오페라 팸플릿에는 제작진 명단에 작은 글씨로‘프롬프터’또는‘음악 훈련’(musical preparation)이라고 나와있다. 커튼콜 때 무대에 불려 올라가는 일은 없지만, 출연진과 제작진이 참가하는 공연 뒤풀이에선 가장 많은 박수를 받는다.

프롬프터 하면 대통령 취임식 연설 때 종이 원고를 보지 않고 투명 모니터로 원고 내용을 커닝하는 영상 자막기가 떠오른다. TV 뉴스 진행자들도 카메라에 장착된 프롬프터로 원고를 읽는다. 프롬프트(prompt)라는 동사는 ‘슬쩍 가르쳐 주다’‘생각나게 하다’라는 뜻이다.프롬프터를 가리켜 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에서는 수플뢰(Souffleur)라고 부른다. ‘숨을 불어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에스트로 수게리토레(maestro suggeritore)라고 한다‘힌트를 주는 지휘자’라는 뜻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무대 아래쪽에 나있는 작은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프롬프터 박스는 폭이 150㎝도 안 된다. 반원형의 지붕이 덮여 있어 객석에서는 프롬프터가 보이지 않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가사가 객석에서 들릴 리 없다. 무대에 있는 가수들에게도 프롬프터의 머리와 손만 보인다. 프롬프터 앞에는 피아노 반주 악보를 놓는 보면대, 옆에는 지휘자의 모습이 나오는 폐쇄회로 모니터 2대가 있다.

프롬프터는 가수가 갑자기 가사를 까먹었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무대에서 발생하는 비상사태를 전화로 백스테이지에 알려준다. 거의 드문 경우이지만 목소리가 잠겨 버린 가수를 위해 실제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자면 오페라 악보를 훤히 외우는 것은 물론 누가 어느 지점에서 노래를 부르는지도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한다.

프롬프터는 어디까지나 지휘자의 오른팔이다. 자기 마음대로 템포를 정하면 문제가 발생하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가기에 바쁘기 때문에 일일이 가수들에게 큐 사인을 줄 수 없다. 대신에 피아니스트 또는 부지휘자 출신의 프롬프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쉴 새도 없이 가수들이 들락거리면서 적게는 2명, 많게는 10명의 주역 가수들이 노래하는 모차르트와 로시니 오페라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큐 사인과 가사 힌트를 주느라 바쁘다. 색깔도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른 물건들을 양손으로 던지고 받는 마술사와 같다. 가수들이 마음 놓고 ‘고공 줄타기’ 묘기를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든든한 ‘안전망’인 셈이다. 가사를 미처 외우지 못한 가수들을 위한 도우미가 아니라 음악과 드라마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길잡이다.

주역 가수가 갑자기 대타(代打)로 투입되거나 낯선 초연 작품엔 프롬프터가 더욱 바빠진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극장을 누비며 활약하는 가수들이 많이 출연하는 작품에선 리허설 시간도 그만큼 짧다. 프롬프터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이유다. 어떤 가수가 무대 한복판에 얼어붙은 듯 서서 노래한다면 영락없이 프롬프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무대에선 오케스트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혼자 허공에서 노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프롬프터가 박자와 리듬, 가사와 함께 정확한 시작 지점을 알려주면 마치 벼랑 끝에서 튼튼한 밧줄을 잡은 기분이 든다. 프롬프터는 입술을 터뜨리는 가벼운 소리로 리듬을 알려주기도 한다. 가끔 오페라 공연 실황 DVD를 들어보면 프롬프터의 소리가 담겨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피날레 장면에서 이졸데의 시체를 프롬프터 박스 위에 올려 놓기도 한다.

1999년 소프라노 루스 앤 스웬슨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주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몇달 전부터 함께 연습해오던 스웬슨은 갑자기 몸이 아파 공연 개막 24시간 전에 출연 취소 결정을 내렸다. 대신 트레이시 달이 투입됐다. 하루 전날 도착한 그는 공연 당일 오후 7시 지휘자와 만나 피아노 반주로 한번 리허설을 했고 공연은 8시에 시작됐다. 플루트 반주로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는 1막이 끝난 후 휴식 시간에 백스테이지에서 연습했다. 트레이시는 공연 내내 프롬프터 박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튼콜에 등장한 트레이시는 몸을 앞으로 숙여 프롬프터와 악수를 나눴다. 관객들은 그때 프롬프터의 손을 난생 처음 보았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녹음한 ‘라 트라비아타’는 1958년 3월 리스본 산 카를로 국립극장 실황녹음이 가장 유명하다.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리스본 라 트라비아타’로 알려진 명반이다. 1997년 EMI레이블에서 CD로 재발매된 이 음반에는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가 상대 역인 알프레도 역으로 출연한다. 이 음반에서 옥에 티는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평소 프롬프터의 ‘볼륨’을 크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으로 악명이 나 있었다. 한번은 칼라스가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노래 중간에 무대 앞쪽으로 나오더니 아랫쪽으로 보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더 크게(Piu forte)!”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엔리코 카루소 등도 프롬프터가 없으면 무대에 서지 않았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파바로티가 ‘라보엠’ 로돌포 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갑자기 3막 중간쯤에서 극장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샹들리에가 춤을 추고 있었고 겁에 질린 일부 관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출구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일이죠?” 파바로티는 노래 중간에 프롬프터에게 물었다. “테레모토(Terremoto)! 지진이 났어요!” 프롬프터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말했다. 파바로티는 미미 역의 소프라노 도로시 커스텐의 손을 꽉 쥐고는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풍부한 발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진은 곧 잦아들기 시작했다. 객석 분위기도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또 한번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파바로티의 노래에 청중이 전율하기 시작한 것이다.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카프리치오’의 등장 인물 가운데는 공연 도중 꾸벅꾸벅 조는 프롬프터가 나온다. 노르웨이 영화‘프롬프터 ’(1999)에서는 베르디‘아이다’공연을 앞두고 연습하는 프롬프터가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그의 일터인 오페라 극장 프롬프터 박스에는 악보가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대본’이 없기 때문에 부닥치는 일마다 짜증스럽다.

연출자에 따라 무대 효과와 시선 확보를 위해 프롬프터 박스를 치우기도 하고 불룩 튀어나온 프롬프터 박스를 무대 세트로 가리기도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근무하는 프롬프터 9명 가운데 풀타임은 4명이다. 연봉은 7만5000~10만 달러(약 8000만~1억3000만원).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리허설을 참관해야 한다. 작품을 훤하게 외우는 것은 물론 지휘자의 템포나 가수 개개인의 호흡을 기억해 두기 위해서다. 오후 8시부터 자정 가까이 프롬프터 박스에서 근무한다. 시즌당 5~6편의 작품을 맡고 매주 1~3회 공연에 투입된다. 쉬는 날에는 객석에서 발 쭉 뻗고 오페라를 즐길 것 같지만 청각을 예민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공연 관람은 하지 않고 그냥 쉰다고 한다.

국내 오페라 공연에서는 프롬프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산과 시설 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무대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8중창을 완벽한 앙상블로 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프롬프터는 오페라극장의 ‘필수 악기’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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