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한인들>3.갖가지 시행착오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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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땐 다 망하는 줄 알았어요.치솟아 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치펜데일」이라는 고급가구 공장을 하는 김재홍(金才洪.51).김경희(金京姬.45)씨 부부는 3년전 화재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여느 곳이 아니라 신나통이 잔뜩 쌓여있는 도색실(스프레이룸)에서 불이 났으니 공장이 통째로 날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행동이 굼뜬 편이던 직원들이 제몸 아끼지 않고 진화에 나섰다.화염속에서 신나통을 굴려 문밖으로 끄집어내는 실로 위험을 무릅쓴 작업이었다.결국 신나통 폭발은 막았고 이 덕분에 화재피해는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金씨 부부는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공장을 돌리기에 급급,화재위험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채 일하다 당한 사고였다.사고가 수습된 후 金씨부부는 감사의 표시로 모든 직원들에게 신발.옷.식용유를 돌리기도했다.이들 부부의 인도네시아 정착과 정은 색다르다.64년 미국으로 이민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고가구점을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던 이들은 지난 87년초 시장조사차 발리섬으로 왔다가 여기에서가구공장을 하며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공장을 짓기 위해 4천1백평의 땅은 샀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주변이 공장지역이 아니라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가구를 전혀 모르는 현지인들을 일단 채용한 후 한국에서 데려온 4명의 기술자를 통해 교육부터 시켰다.
가구 공구도 현지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처음엔사포도 없어 한국에서 가져왔다.생산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6명(지금은 2~3명)이 한국사람 1명 몫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金씨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차가 좌측으로다니는 이곳 운전관습에 미숙했던 탓에 우측으로 가다 마주오는 차와 정면충돌한 것이다.이 사고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9개월간 병원신세를 졌다.이런 고생끝에 金씨부부는 3 백명의 종업원과 함께 특급호텔에 각종 가구를 납품해 연간 3백50만달러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뿌리를 내렸다.金씨부부와 같이 아시아 한인중에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없이 진출한 사람들이 꽤 있다.그러다보니 자연 시행착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종업원 2만5천명에 연매출 6억달러로 인도네시아에서 30대 그룹안에 들 정도로 성장한 코린도그룹의 승은호(承銀鎬.54)회장도 시행착오라면 할 말이 많다며 87년에 일어난 파업사태를 얘기해주었다.「이글(독수리)」이라는 상표로 신발을 만드는 공장의 한국인 작업반장이 게으름피는 한 현지근로자를 공개적으로 타박준 것이 발단이 됐다.모욕당한 직원이 한국인 반장을 한대 갈겼고,반장은 나중에 그를 사무실로 불러 앙갚음한 뒤 해고시켜버렸다.다음날 사태는 급격히 악화 됐다.출근길에 근로자들이 사무실을 부수고 공장에 불을 지르며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결국 인도네시아 공수부대와 노동부장관까지 나선 뒤에야 겨우 진정됐다.承회장은 여러사람 앞에서 모욕당하면 갑자기 욱하는 성격이 발동하는 현지 근로자들의 성향을 잘 몰라 일어났던 일이라며 씁쓰레 웃었다.
동남아시아=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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