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20. 아! 육영수 여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육영수左 여사는 마치 학처럼 고고했다. 청와대 행사 때 필자 부부가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운명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와 지하철 1호선 개통식 등 행사가 다섯 가지나 있었다. 경호실 직원은 200명밖에 안 되는데 스트레스가 심했다. 또 육영수 여사가 “민주국가에서 경호가 너무 노출되면 안 된다”고 해서 전부 뒤에 숨어 들어갈 때였다. 박종규 경호실장만 단상에 있고, 경호관들은 다 무대 뒤에 있었다. 무대 뒤에서는 조명 때문에 관중석이 보이지 않았다. 입장객 검색도 시원치 않았다. 초청장을 집에 두고 왔다는 문세광을 그냥 통과시켰다. 나중에 책임자들이 머리 깎고 절에 가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일이 벌어졌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잠시 연설대 아래로 몸을 피했다가 상황이 끝난 뒤 다시 일어나 연설을 계속했다. 그 사이 머리에 유탄을 맞은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연설을 끝낸 대통령은 육 여사가 보이지 않자 벗겨진 고무신을 직접 주워서 퇴장했다. 정말 비참한 장면이었다. 육 여사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병원 측에서 육 여사의 혈액형이 특수형이라 경호관 중에 그 혈액형이 있는지 찾는 도중 육 여사는 서거하셨다. 육 여사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분통이 터진다.

빈소가 청와대 본관에 차려지고 박 대통령이 서서 가족과 함께 조문을 받는데 얼굴이 벌갰다. 우리도 올라가서 조문을 했다. 박종규 실장이 우는 것을 처음 봤다. 첫 날에는 영애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가 없었다. 그해 서강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레노블대에 유학 중이었다. 육 여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 행렬이 청와대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졌다.

장례식 날, 청와대 마당에서 비서실과 경호실 전원이 모여 조촐하게 영결행사를 했다. 경호실 대표는 나였다. 박 실장은 계속 본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다. 정문으로 상여차가 나갈 때 양쪽으로 비서실과 경호실 직원이 서열 순으로 서서 배웅을 했다. 대통령이 우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해 장례식에는 가시지 않도록 결정했다. 정문에서 상여차를 배웅하던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니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모시고 들어갔다.

경호관 중에 안재송이란 사격선수가 있었다. 자기가 평생 권총을 배웠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육 여사가 돌아가셨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안재송도 79년 10·26 때 박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나는 사표를 냈다. 사흘 뒤 박 대통령이 불렀다. “며칠 뒤처리하느라 바빴어. 정리되면 다시 부를 테니 휴가 가있어” 하면서 직접 서명을 한 편지봉투에 당시로서는 큰 액수의 금일봉을 주셨다.

나는 곧 육 여사 묘소에 들른 뒤 영원히 청와대를 떠났다.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이 전쟁 통에 군인이 됐다가 예상치 않았던 청와대 근무까지 하고 24년 만에 사인(私人)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태권도 총재와 체육회 부회장으로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김운용

[J-HOT]

▶ 쏟아지는 급급매물 '아파트 잔치' 끝났다

▶ 페일린의 6살 딸 '손가락 욕설'? 알고보니

▶ "UFO 20대가 강한 빛 내며…" 광화문 발칵

▶ 최진실 동생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분노

▶ '이병' 제대 김무성 100% 명중…장교 출신들 무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