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행복한 책읽기 커버 스토리] 절절한 情 가슴 적시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 여류 노학자가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 그린 ‘아버지와의 만남’, 앞 못보는 부부가 농부로 살아가는 이야기 ‘엄마의 행복’, 장애아를 둔 일본인 학자의 책을 넘기며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읽을 책을 잔뜩 싸들고,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 친밀한 혈육의 정을 더 나누라는 가정의 달. 5월엔 유난히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꼭 그래서 고향을 찾은 건 아니다. 어머님이 몹시 앓고 계시단 소식에 걱정이 되어 일거리를 싸들고 부리나케 오고야 말았다. 요사이 지병이 더 심해지신지라 식사도 못하신다니, 이런 상황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혼자 식사하시는데 아픈 몸에 밥맛도 없고 재미도 없으셨을 거란 동생 얘기에 수저로 된장국에 밥을 얹어 먹여드렸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가족은 앨범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낡은 사진에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 이쁜 엄마, 이것 드시고 기운내요!”

처음엔 꼼짝을 못하시더니 나의 성화에 겨우 반 공기를 드셔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엌에서 엄마를 위해 과일을 깎으시며 말씀하시는 아버지.

“네 엄마랑 20년만 더 살면 좋은데, 엄마가 너무 아파서 속이 타는구나.”

“아버지, 그래도 엄마가 좋으시죠.”

“그럼, 최고지. ”

아, 최고란 말씀에 부부의 정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 부모님의 애틋한 정을 보는 자식의 기쁨과 안정감, 감사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인연이란 따뜻하고도 슬프면서 질긴 흔적들…. 혈육이란 건 특히나 기묘해서 오랜 세월을 서로 다투면서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 생각, 습관, 가치관까지 부모님도 어느새 오누이처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정치가의 삶을 사시면서 중년이 훨씬 넘어서까지 그렇게 고생시키시더니 10년 전부터 병든 엄마의 가게를 도우며 직접 요리를 하시고, 방 청소, 아들의 셔츠까지 다림질 하시는 등 엄마의 병 수발에 열심인 아버지께 늘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내 추억 속엔 엄마와 아버지가 연인이라기보다 많이 다투는 친구의 모습이 거의 전부다. 다투실 때마다 나는 마음의 혼란과 방황으로 떠돌았고, 좋았던 기억보다 괴로웠던 기억이 더 많던 시절. 이제 아련해져 꿈같기만 한데, 강인숙의 에세이 『아버지와의 만남』을 읽으면서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이리도 세세히 관찰하고 고민했을까 싶어 놀랍고 내심 부끄러웠다.

오랜 세월 동안 고뇌의 힘으로 추억을 다듬고, 지켜온 노력인 것이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데도 세세하게 모른다는 것에 죄스러움까지 스며든다. 나도 언젠가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내력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던지라, 이 책에 마음이 닿아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이어령 선생님의 아내이자 국문학자인 강인숙씨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아버지의 초상’, 그리고 그 부정과 긍정의 놀라운 변증법적 사랑. 살아서도 효녀였던 딸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에게 바친 애정의 찬가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어른인 부모는 우리 삶의 모델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인간의 길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혼자 더듬어가면서 스스로의 가치체계를 찾아나간다. 부모의 세계를 본받으면서, 교정하면서 새로운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노학자가 들려주는 진솔한 인생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에피큐리언 아버지와 인고의 어머니, 그 원형의 관계에 관한 인간 연구로도 보인다. 또한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말하지 못했던 조각글들이기도 했다.

선생의 소중한 지인들에 대한 기억은 어른이 사라져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곰곰이 두고 곱씹을 만한 테마를 많이 던진다.

삶의 첫머리에서 만난 ‘난해한 어른’인 저자의 아버지는 향락주의자셨다.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옷치장을 좋아했으며 춤추기와 여행, 도박을 즐겼고 여자 사랑하는 일에 평생 심혈을 기울였다. 지적 호기심도 왕성해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또한 박애주의자였다. 자기를 해친 사람에게까지 관대했던 ‘희귀종 선인(善人)’이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성품을 한 몸에 지니고 숨을 다하는 날까지 사는 것 자체를 즐겼던 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근원적인 존재였던 아버지. 이를 되돌아본 문학평론가 딸의 나이는 올해 71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저자가 던진 말은 포크송 가수 밥 딜런의 노래 한 구절이었다. ‘얼마나 더 많은 길을 걸어야 인간이 되나?’

정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인간이 될까? 그녀의 인생. 그 큰 부분은 아버지였다. 누구에게나 자식에겐 부모의 인생이 고스란히 스며들게 마련이기에, 부모의 운명에 따라 자식의 가치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향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선생에겐 어찌 보면 아버지와의 투쟁사라고도 할 만큼 애증으로 점철된 사이였노라고 고백한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아버지와 전통적인 조선의 여인이었지만 언제나 선생의 흔들림 없는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그리고 그녀와 간난신고를 함께 겪었던 소중한 형제들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은밀한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이 책은 선생의 개인사를 담고 있지만 우리 시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화상이자 가족에 대한 절절한 토로다. 그래서 이 책은 지난 시절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과 가치를 새롭게 반추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리라 본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녀의 책을 통해 우리 가족사를 투영해서 들여다보며, 공감하고, 다시금 되새겨보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실린 가족사진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남의 사진이지만, 옛 사진을 통해 아련하고 슬픈 감정이 고개를 든다. 지금이야 카메라 폰이나 비디오카메라, 디지털사진기를 누구나 소지하고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게 사진이지만, 나의 20대는 가족 사진 하나 변변하게 없어 옛 기억을 되살려낼 아쉬운 심정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이 낡고 흐린 사진들을 보면 조만간 가족 사진을 함께 찍어둬야겠다는 각오가 생긴다.

또 하나의 책도 이런 분들이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에 가슴 숙연했다.

앞을 볼 수 없는 부부가 농사를 지으며 4남매를 장성시키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손자손녀를 키우며 계속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힘들면 포기해버리고 헤어져버리는 세상에서 이들 부부와 가족이 살아온 삶과 가족애, 인생 이야기는 비장애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한다.

박흥식 할아버지가 시력을 잃은 것은 열살 때. 6·25 때 삼눈(핏발서는 것)을 앓고나서 제대로 치료도 못해 아주 못보게 됐다. 지인자 할머니도 전쟁통에 손님마마(수두)를 앓고 난 뒤에 시력을 잃었다.

그래도 당시엔 희미하게 시력이 남아 있었지만, 첫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그 눈마저 잃었다. 경기도 평택 서정리에 있는 점자학원에서 만난 인연으로 40년간 농사를 함께 지으며 4남매를 장성시켰다. 농사일은 주로 밤에 나가 한다. 더듬더듬 일하는 거 남들이 보면 답답해할까 봐 일부러 그래왔다고 했다.

“안 보이는 거야 매한가지니 밤에 일하면 오히려 시원하고 일하기도 좋아.”

최근 두 부부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엄마의 행복』이 출간됐다. 시집간 큰딸 명화씨가 아이를 키우면서 ‘평생의 지팡이’였던 앞 못 보는 부모의 ‘더 큰, 더 소중한 사랑’에 대해 털어놓은 사랑의 찬가다.

마지막으로 살피게 된 책은 일본에서 장애인을 가족으로 지닌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꾸준히 읽혀진 스테디 셀러 『자라지 않는 아이를 보듬고』는 다운증 아이를 둔 아버지가 모은 20년 동안의 감동 기록이다.

이 글을 쓴 저자는 일본의 사회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저명한 경제학자이지만, 학자이기 이전에 장애인을 둔 한 아버지로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사회야말로 정말로 인간적인 사회라고 말한다.
부모나 형제, 자식의 이름은 가슴 찡한 그 무엇이다. 가슴 속에 고여가는 끈끈하고 뜨거운 액체 바로 이것이 사랑일까.

인생의 굴곡을 더듬으면서 따뜻하고 조촐한 식사와 여행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가정의 달에 읽어볼만한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그 간절함은 배가되었다.

신현림

*** 신현림

1961년 경기도 의왕 출생.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상명대 디자인대학원 순수사진 전공. 시인. 사진가.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세기말 블루스』를 출간. 에세이집 『나의 아름다운 창』『시간창고로 가는 길』등이 있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