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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잠자리 들라”며 야경대는 왜 나팔을 불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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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밤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돌베개, 560쪽, 2만5000원

 17세기 초의 영국시인 토머스 미들턴은 “밤에는 잠자고 먹고 방귀 뀌는 것 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로부터 “밤에는 어떤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고, 역사 속에서 밤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미국 버지니아공대 역사학 교수인 로저 에커치는 밤을 “또 다른 왕국” “미지의 땅”으로 본다. 태고적부터 밤에는 “낮의 현실과는 아주 다른 풍요롭고 생동적인 문화가 있어 왔다”며 이 책을 통해 “인간 경험의 잊혀져버린 절반”인 밤의 역사를 복원해 냈다. 덕분에 중세 말기에서 19세기 초 서유럽 지역의 다채로운 ‘밤의 생활’이 제대로 조명받게 됐다.

‘밤은 악령의 것’이라는 속담이 암시하듯 산업혁명 이전에 밤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밤이란 저녁마다 하늘에서 유해한 증기가 내려오는 것이었고, 유령과 사악한 요정, 뱀파이어와 마녀들이 찾아오는 악몽의 시간이었다. 익사·도둑질·화재·폭력 등 밤의 사건들은 끈질기게 생명을 위협했다.

17~18세기 초까지 밤거리엔 약탈과 방화의 위험이 넘쳐났다. 몇몇 예외를 빼면 도시의 강도는 유럽 전역에서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림은 윌리엄 호가스의 ‘밤’(1738). 행인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칼과 지팡이를 들고 걸어가고 멀리 뒤 편에서는 큰 화재가 일어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돌베개 제공]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행정·종교 관료들은 밤의 위험에 대해 통행금지에서 야경(night watch)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약과 억압’조치로 대응했다. 통행을 제한하기 위해 성의 문을 걸어 잠갔으며 몇 시간 후에는 잠자리에 들라는 뜻으로 종을 울렸다.

저자는 야경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둠에 대한 공포와 함께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다. 야경대원들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거나 노래를 불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들은 밤에 매시간 우리의 잠을 깨워놓고는 잘자라고 소리친다”(희곡 『가면무도회』·1723년 경)고 투덜댔을까.

밤이 반드시 고통의 근원만은 아니었다. 밤은 “즐거움과 유희를 억압하는 수많은 규칙과 의무, 낮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평민들에게 실잣기 모임은 긴 겨울 동안 함께 즐기고 연애를 하기 위한 정규적인 자리였으며, 가면무도회는 귀족들이 숨막히는 궁정 예절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기회였다.

산업화 이전 서유럽 사람들은 거의 매일 밤 자던 중에 깨어 두 번 잠을 잤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첫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독서나 기도를 하거나, 꿈이야기를 나누거나, 먹기도 했으며, 부부관계를 한 뒤 ‘두 번째 잠’을 잤다는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의사 로랑 주베르는 이른 새벽의 성관계 때문에 농부나 기술자나 노동자들이 아이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편 유럽의 농촌에서는 대 여섯명에 달하는 식구 전체가 한 침대를 쓰는 일도 흔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장 루이 플랑드랭은 “식사 이외에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침대는 가정의 단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

에커치는 이 책을 통해 꼼꼼한 역사학자와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광범위한 자료 연구도 놀랍지만(참고문헌과 각주의 분량만 100쪽이 넘는다) 마치 눈앞에 영상을 펼쳐보이듯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읽는 이를 ‘홀리기에’ 충분하다.

‘밤의 역사’라는 렌즈를 통해 중세 이후 민중들의 세세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원제 『At Day’s Close : Night in Times Past』.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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