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7. 총리 의전비서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5·16 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左)이 잠시 내각수반을 겸직했을 때 의전비서관으로서 모실 기회가 있었다. 손님을 맞을 때도 박 의장은 대장 복장, 필자(中)는 중령 복장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아침, 서울 아현동 집에서 자고 있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특무부대장 이철희 장군에게 전화를 했더니 “쿠데타”라고 했다. 당시 정일권·송요찬·최영희 장군이 미국에 있었는데 송 장군만 혁명 지지를 선언했다. 얼마 안 가서 송 장군이 국방장관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송 장관은 참모총장 시절 수석부관이었던 나를 다시 불렀다. 이번엔 국방장관 보좌관이었다.

혁명 주체인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송 장관이 내각수반(총리)이 됐다. 나는 의전비서관이 되어 의전, 통역, 전화, 영문, 스케줄 관리 등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수반이 외무장관을 겸직하게 됐고, 나도 외무장관 비서관을 겸직했다.

이때 상공장관이 정래혁 소장이었다. 정 장관이 영국에 출장을 가는데 수반 지시로 정 장관에 대한 신임장을 쓰게 됐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발설할 때는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서약서까지 썼다. 무척 기분이 나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폐개혁을 하기 위해 영국에서 새 돈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신임장이었다.

한번은 외무부에서 콩고 브라자빌(지금의 콩고)과 모로코에 대사관을 설치하는데 대리대사(참사관)로 가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모로코를 희망했더니 모로코는 이미 내정(신기흠)됐으니 콩고로 가라고 했다. 콩고가 어딘지도 모를 때였다. 책을 보니 제2차 세계대전 때 드골 장군이 있었던 곳으로 전염병이 많고 거리는 불결했다. 예편을 하면서까지 가기는 싫었다. 만약 그때 콩고에 갔다면 내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 거다.

윤보선 대통령이 물러나고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후 혁명 주체세력은 송요찬 내각수반을 거북하게 생각했다. 송 장군은 4대 의혹 사건을 놓고 중앙정보부장과 충돌하더니 박정희 장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각수반 직을 사임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을 겸직했다. 이때 잠깐 박 대통령을 옆에서 모실 기회가 있었다.

1개월 후 민간인인 김현철 경제기획원 장관이 내각수반으로 임명됐다. 현역 군인인 나는 비서관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계속 근무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남았다.

63년 3월, 독일 정부와 아세아재단 등의 초청으로 독일·영국·미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민정이양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다. 김포공항에 내리니 검은색 옷차림의 두 사람이 다가와 “심문할 것이 있으니 동행하셔야겠습니다”라고 했다. 간 곳은 중앙정보부 서울분실 취조실이었다. 송요찬 전 수반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군은 민정이양 하고 복귀하라’는 성명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에 내가 관여했다는 혐의였다. 협박도 하면서 밤늦게까지 조사했으나 나오는 게 없으니 풀어줬다. 다음날 아침 총리공관에 가서 김현철 수반에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사임하겠습니다”고 했더니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젊은 인재들을 망친다”며 “그냥 있으라”고 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국가의 가장 큰 힘은 역시 사람이다.

김운용

[J-HOT]

▶ "한국에 돈 부쳐줘요" 中 창구마다 북적

▶ "그걸 감싸?" 한나라 싸늘…차관, 사면초가

▶ 무디스 "강만수 장관 가벼운 발언에 韓위기 증폭"

▶ 21억 들어간 휴게텔, 3년째 아무도 사용 안 해

▶ 105세 숫처녀 할머니 "장수 비결은…"

ADVERTISEMENT
ADVERTISEMENT